노란 은행잎이 유난히 예쁜 늦가을 저녁이었다. 퇴근하던 중 아파트 단지에서 엄마를 발견했다. 친정엄마가 아이의 책가방을 메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너무 익숙한 풍경인데, 그날따라 노란 풍경 속 엄마의 모습을 보며 유난히 마음이 저릿했다.

나는 워킹맘이다. 같은 아파트 앞동에 친정집이 있다. 우리 집과 엄마의 집 사이는 우리와 엄마가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통로가 되곤 한다. 딸아이는 평일엔 우리 집에서, 주말엔 할머니 집에서 지내며 두 집의 온기를 나눈다. 그 덕분에 나는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고, 엄마는 손녀와 함께 늦게 배운 여유와 기쁨을 누린다.

아이는 말한다. “넘버 원, 투는 할머니, 할아버지야. 엄마는 3번, 아빠는 4번이야.”

그 말을 들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지만 마음 한 켠이 시큰해진다. 아이에게 자리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존재가 큰 까닭이다. 내가 해주지 못했던, 함께 있어주지 못했던 시간을 엄마와 아빠가 나 대신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미안함이 자리한다. 만약 엄마와 아빠가 해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아이를 온전히 키울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이는 지금은 병원에 계신 할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나는 그동안 아빠와 애정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와 하지 못했던 것을 손녀인 내 아이와 함께 나누신다. 아이와 함께 산책을 하고, 간식을 나누고,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한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다정하고 따뜻하다. 그 옆에서 엄마는 조용히 웃으며 그 시간을 함께 한다. 삶의 어느 시기에선가 멈춰 있었던 사랑의 표현이 지금은 세대를 건너 흘러가고 있다.

오늘따라 아이의 책가방을 메고 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엄마의 인생이 사진처럼 펼쳐진다. 엄마의 지난 세월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일곱 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학교를 제대로 다니질 못했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옛 사람들의 뿌리 깊은 인식에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리고 동생 학업 뒷바라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엄마라고 꿈이 없으셨을까. 분명 소녀 엄마는 꿈을 갖고 있었을 거다.

그 어린 시절의 꿈을 꾸듯 ‘학교 가는 엄마’가 내 눈앞을 지나가고 있다. 어쩌면 엄마에게 책가방은 배움의 기회이자 놓치고 지나간 꿈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 책가방은 손녀의 것으로 바뀌었지만, 그 안에는 엄마의 바램과 사랑이 함께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 가슴이 또 아려온다.

돌봄은 세대를 건너 이어진다. 부모가 나를 길렀고, 이제는 부모가 내 아이를 기른다. 그 시간의 고리 안에서 나는 일과 가정 사이를 오가며 또 다른 세대의 징검다리가 되고 있다.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자란 내가 이제는 누군가를 돌보아야 한다. 문화는 결국 이런 일상의 결에서 비롯된다. 삶 속의 작은 행동과 시선, 그 안에서 피어나는 관계의 온도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문화의 형태다. 책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한 노모의 뒷모습 속에 세대의 역사와 감정, 그리고 사랑의 언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아파트 단지에서 본 엄마의 뒷모습이 오래 오래 남는다. 그 길 끝에는 아이가 있고, 그 아이의 걸음 뒤에는 또 내가 서 있다. 그렇게 세대는 이어지고, 사랑은 다시 태어난다. 책가방 하나에 실린 세월의 무게가 오늘따라 따뜻하면서도 또 아프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