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의 출생지 상주인가, 광주인가? -
892년(진성여왕 6) 무진주(지금의 광주)에서 거병한 후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경상도 상주 출신인가, 광주 북촌 출신인가? 다소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진 이유는 고대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각기 다른 출생 기록 때문이다. ‘삼국사기’ 권 제50 ‘견훤’ 열전에는 “견훤(甄萱)은 상주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라고 출생지를 밝히고 있다. 상주 가은현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이다.

이에 반해 ‘삼국유사’ 권 제2 ‘후백제 견훤’에는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함통(咸通) 8년(867)에 태어났다”고 ‘삼국사기’처럼 상주 출생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은 설화도 싣고 있다.

“옛날 한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았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단아했다.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로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바늘에 실을 꿰어 그 사람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찾아 북쪽 담장 밑에 이르니 바늘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아기를 배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

견훤의 출신지가 어디인지를 묻는 이유는 상주 출신설이 갖는 논리적 허점이 너무 많아 보일 뿐더러, ‘지렁이 설화’의 땅 광주에 견훤 관련 흔적이 많이 남아 전하기 때문이다. 그가 상주 출신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자개가 견훤의 친아버지(生父)라면 아들의 적수였던 고려의 왕건에게 귀부할 수 있겠는가?

둘째,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하기 10여 년 전인 906년, 견훤이 왕이 돼 상주에 진출하지만, 상주민들의 견훤에 대한 어떤 반응도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셋째, 견훤 정권에 참여한 인물 중 상주 출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반해 광주 출신일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광주·전남에서 군사를 일으킨 견훤은 거병한 지 한 달 만에 5천의 무리를 모은다. 궁예가 3천500의 무리를 모아 자립하는데 10년이 소요됐음과 비교하면 믿기 어려울 만큼의 놀라운 속도다.

둘째, 지훤을 비롯한 박영규, 김총, 능창 등 견훤 정권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광주와 광주 주변 출신의 인물들이다. 견훤 정권의 중심인물 중 상주 출신은 단 한 명도 없다.

- 무진에서 거병후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다 -
견훤은 성장하면서 체격이 남달리 컸고 용모도 뛰어났다. 장성한 견훤은 고향을 떠나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로 올라가 군인이 됐고, 남다른 용맹함과 비범함으로 서남해 연해안을 지키는 방수군의 비장(裨將)에 오른다. ‘창을 베개 삼아 적을 대비하였다(寢戈待敵)’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보듯, 견훤의 기상은 남달랐다.

892년(진성여왕 6년), 견훤이 봉기하자, 한달 만에 그를 따르는 무리가 5천여 명이나 됐다. 서남해 방수군을 손에 넣은 견훤은 무진주를 습격해 신라에서 파견한 지방관인 도독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라 칭한다. 거병 후 왕이라 칭한 견훤은 무진주(광주)에서 완산주(전주)로 옮긴다. 나주를 비롯한 서남해 호족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백제 부흥의 명분을 살리기에는 백제의 제2의 수도권이었던 익산 일대가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를 수도로 삼고 후백제를 건국했다. 정식으로 왕(王)을 칭하고 국호를 정하는 한편, 901년부터 독자적인 연호 정개(正開)를 사용했다. 그리고 중국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기도 했다.

-금산사에 갇히다-
934년, 운주성(충남 홍성군 일대) 전투에서 고려군에 대패하고 돌아온 노년의 견훤은 뒤를 이을 후사로 총애하던 넷째 아들 금강을 선택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견훤의 장남 신검은 이찬 벼슬을 지낸 능환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운다. 이 쿠데타에는 신검의 두 아우인 강주도독 양검과 무주도독 용검 등도 참여한다. 935년 3월, 신검은 아버지인 견훤을 폐위해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의 목숨을 빼앗는다.

견훤이 유폐된 절 금산사(전북 김제시 금산면)

장남 신검의 쿠데타로 견훤은 실각해 왕위를 잃게 되는데, 왕을 칭하며 세력을 일으킨 지 43년 만이었다.

후백제를 건국했던 900년을 기준으로 한다면 견훤의 왕위 재위 기간은 35년이 된다.

견훤을 몰아낸 신검은 반발 세력을 억누르고 대왕을 자처했다. ‘삼국유사’에는 이 상황을 다음처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멀리 궁궐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므로,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연로하시어 나라와 군대의 업무에 어두우시므로, 맏아들인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대신한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신검은 부친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장사 30명에게 지키도록 했다. 신검의 쿠데타가 성공을 거둔 것이다.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된 지 3개월 만인 935년 6월, 막내아들 능예와 딸 애복, 애첩인 고비 등과 함께 금산사를 탈출한다. 그리고 나주를 통해 고려 왕건에게 귀순했고, 왕건은 견훤을 상부(尙父)라 높여 불렀고, 남쪽 궁궐에 거처를 마련하는 등 최고의 예우를 갖춘다. 견훤의 고려 귀순은 후백제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됐었고, 견훤이 고려에 귀순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라 경순왕은 그해 11월, 고려에 귀순한다.

견훤의 말년은 번민의 세월이었다.

자식들과 벌였던 권력 투쟁으로 받은 마음의 상처와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멸망시킨 데에서 온 정신적인 고통 때문이었다. 견훤은 936년 황산 근처의 사찰에서 등창으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친다.

자신이 세운 후백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겨우 며칠 만이었는데, 이때가 그의 나이 일흔이었다.

견훤이 사망한 황산(오늘날 충청남도 논산시)에는 견훤의 무덤이라 전하는 충남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된 ‘견훤릉’이 남아있다. 무덤 앞에는 ‘후백제왕견훤릉’이라 새겨진 비도 서 있다.

후백제왕 견훤릉(충남 논산시)

후백제왕 견훤릉비

-‘견훤대’와 ‘방목평’ -
광주의 북쪽, 영산강 상류 지역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견훤 출생 설화 이외에도 견훤과 관련된 몇 가지 흔적이 더 남아 있다.

사료에 남아 전하는 ‘견훤대’(甄萱臺)와 ‘방목평’(放牧坪)이 그것이다.

견훤대와 방목평에 대해 처음 언급한 관찬 자료는 18세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서’다. ‘여지도서’ 이후 간행된 ‘광주읍지’에도 견훤대와 방목평을 다루고 있고, 그 내용도 ‘여지도서’와 대동소이하다.

‘광주읍지’에 따르면 “견훤대는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甄萱臺 在北州十五里)”고 했고, “방목평은 견훤대 아래에 있으며 민간에 전하길 견훤이 군대를 주둔시키고 말을 기르던 곳이라고 한다(放牧坪 在甄萱臺下俗傳甄萱留陣牧馬之所)”라고 적고 있다.

‘광주읍지’에 보이는 ‘견훤대’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광주광역시 북구 생룡동 뒷산인 ‘대포리봉(죽취봉으로도 불림)’ 설과 광주광역시 북구 동림동의 ‘대마산(大馬山)’설로 견해가 엇갈린다.

견훤이 태어났다는 전설을 품은 생룡동(광주광역시 북구 생룡동)

대포리봉에는 흙과 돌로 쌓은 성터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 성터 꼭대기가 견훤대라는 것이다. 대포리봉을 견훤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견훤이 광주 북촌에서 출생했다는 ‘삼국유사’의 설화나 생룡 마을 등 ‘용’(龍)자 이름이 붙은 동네 이름과 관련짓기도 한다. 그러나 대포리봉이 있는 생룡동은 옛 거리상으로 북쪽 40리에 있던 동네로, 이는 당시 견훤대가 ‘북쪽 15리에 있었다’는 기록과 맞지 않는다.

이에 반해 동림동의 대마산(93.9m)이 견훤대라는 증거는 이렇다.

19세기에 제작된 ‘비변사인 방안지도’(備變司印方眼地圖)의 주기(註記)에 “견훤대는 황계면에 있다(甄萱臺在黃界面)”고 밝히고 있다. 황계면은 대마산이 있는 지금의 동림동 일대를 부르던 옛 지명이다. 또한 이 지도의 주기에 “황계면이 읍치로부터 10-1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 견훤대가 ‘북쪽 15리에 있다’고 했던 ‘광주읍지’의 기록과도 부합된다.

19세기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도 견훤대가 황계면(현재의 운암동) 남쪽에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더욱이 대마산은 왕조대(王祖臺)로 추정되는 광·송간 도로변의 사월산(혹은 백마산으로도 추정함)과도 서로 마주보고 있어 “왕조대는 견훤대와 더불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王祖臺 與甄萱臺 相對)”는 ‘여지도서’의 기록과도 부합된다.

19세기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 속에 보이는 ‘견훤대’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동국지도’는 황계산(지금의 운암산) 옆에 별도의 산을 그려놓고 이곳을 견훤대라고 표기하고 있다. 옛 기록을 정리해 보면 견훤대는 북구 대포리봉보다는 동림동의 대마산이 맞아 보인다.

그럼 방목평은 어디에 있었을까? ‘광주읍지’에 방목평은 “견훤대 아래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전하기를 견훤이 진을 치고 말을 기르던 곳이라 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방목평은 견훤의 군대가 진을 치고 말을 길렀던 곳으로, 견훤대 아래에 위치했다.

16세기 인물인 회재 박광옥은 극락강가의 풍영정에 올라 시를 쓰고 그 말미에 “정자 앞에 견훤이 포위를 풀었던 곳(亭前甄萱打圍之地)”이라고 주(註)를 달았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회재는 그곳이 ‘견훤대’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견훤 전설이 깃든 장소가 육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풍영정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풍영정에서 바로 보이는 93.9m의 야트막한 산이 동림동 대마산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대마산을 견훤대로 인식했다면 산 아래 극락강을 낀 너른 벌판이, 견훤이 군대를 주둔시키고 말을 기르던 ‘방목평’이었을 것이다.

견훤의 출생지가 상주인지, 광주인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광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지렁이 설화 뿐 아니라 견훤과 관련된 ‘견훤대’, ‘방목평’이라는 지명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광주는 비운의 군주 견훤이 세운 후백제 건국의 토대였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