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필리핀, 민주화의 아픈 기억 예술로 잇다
[광주비엔날레 눈여겨볼 파빌리온]<8>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필리핀 파빌리온 ‘시간 속의 습작’ 11월1일까지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 본 국가 폭력의 상흔…예술적 연대로 승화
독재·강제실종·빈곤·노동과 개인의 기억 겹치는 방식, 저항 역사 조명
2026. 10. 12(월) 19:35 가+가-
독재정권 아래 벌어진 집단 학살, 강제 이주, 인권침해 속 개인적이고 정치적 차원에서 겪는 순수성 상실의 기억이 5·18민주화운동의 현장에 놓였다.

민주주의를 일궈 낸 광주를 무대로 한국과 필리핀 양국의 분절된 역사의 결정적 순간을 연대하기 위한 대화를 모색하는 자리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 필리핀 파빌리온 ‘시간 속의 습작’(Studies in Time)이 오는 11월1일까지 전남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과 필리핀 국립대학교 딜리만 캠퍼스 미술대학(UPCFA)이 공동 개최하는 이번 전시는 광주와 필리핀이 각각 겪었던 민주화운동과 국가폭력의 기억을 나누고, 이를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기 위해 마련됐다.

인권운동가이자 UPCFA 학장인 아들마리 토임 이마오 주니어가 전시를 이끈다.

전시에는 작가와 예술공동체 등 12개팀이 참여해 회화와 대형 설치, 미디어아트, 퍼포먼스 기록 등 30여점을 선보인다. 참여 작가들은 모두 필리핀 국립대학교를 중심으로 거주와 노동, 교육, 예술 활동 등을 통해 연결돼 있다.

전시 제목은 역사학자 조지 쿠블러의 ‘시간의 형상: 사물의 역사에 관한 비평’과 필리핀 혁명가 케리마 로레나 타리만의 시집 ‘시간의 습작: 새로운 것에 대한 오래된 시’에서 가져왔다.

서로 다른 시대의 작가들이 권위주의와 인권침해, 도시화와 빈곤, 이주와 강제 이동에 어떻게 반응해 왔는지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고, 그 기억이 어떻게 다음 세대의 행동과 연대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시작점은 1970-1980년대 필리핀 독재체제와 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은 세대다.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 대표를 지낸 호세 텐세 루이스는 마르코스 독재정권의 계엄령 당시 정치범과 고문 피해자를 기억하는 대형 설치작품 ‘파나굴리스, 시손, 오캄포, 모랄레스 등에게 바치는 경례’를 선보인다. 민다나오 출신 페데리코 도밍게스는 전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빈민촌의 삶과 농촌·원주민 공동체의 현실을 템페라 작업으로 보여준다.

고 캡 레예스는 종이라는 연약한 재료를 통해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사라져가는 순수함을 표현한다. 쉽게 찢어질 수 있지만 동시에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종이의 성질을 이용해 개인의 기억과 시대의 불안을 겹쳐 보여준다.

고 캡 레예스作 ‘바타-바투타 (아이, 바통)’


이전 세대의 경험은 젊은 작가들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이데스 마카판판 作 ‘Winala의 잔재, 나와왈라, 나왈란 (사라짐, 실종 실종, 잃어짐)


이데스 마카판판은 설치작품 ‘실종, 미아, 상실’을 통해 국가권력에 의해 사라진 강제 실종 피해자, 이른바 ‘데사파레시도’의 문제를 다룬다. 옷과 빛으로 구성한 작품은 사라진 사람들의 빈자리와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의 시간을 함께 보여준다.

레난 오르티스는 상업 간판을 연상시키는 네온사인 작업 ‘제노사이드 중단’으로 집단학살과 제국주의의 폭력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노동을 바라보는 작업도 눈길을 끈다.



페데리코 도밍게스作 바다의 판잣집 II’(사진 上)과 제프 카르나이&라켈 데 로욜라作 ‘푸소, 풀소’ 설치작품


필리핀 노동운동과 연대하며 1979년 설립된 예술단체 땀비산 사 시닝과 회장 조 타니에를라는 포스터와 회화를 통해 거리의 투쟁과 일상 속 저항을 함께 보여준다.

다니엘 마드리드는 필리핀 비사얀 제도의 네그로스 옥시덴탈 지역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사탕수수가 자라는 동안 일자리가 사라지는 ‘티엠포 무에르토’ 시기의 빈곤과 노동자들의 현실을 담아낸다.

전시가 열리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이번 파빌리온의 의미를 더한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옛 광주가톨릭센터에 자리한 기록관은 시민들의 증언과 군법정 자료, 피해자의 병원 기록과 일기, 언론인의 사진 필름과 취재수첩,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 등 5·18과 관련한 민주주의 투쟁의 방대한 기록을 보존한 곳이다.

김호균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가 민주화의 기억을 예술적 연대로 승화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변은진 기자
변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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