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시대, 소공동체 ‘살롱’서 찾는 인간의 자리 / 김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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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9. 30(수) 18:50 가+가-
디지털 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일상의 편리함은 극대화됐지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던 정서적 유대는 역설적으로 옅어지고 있다. 화면 속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롭지만, 현실 속 개인은 파편화돼 깊은 외로움과 고립에 직면한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지적했듯, 현대인은 외부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과잉 성과’의 압박 속에 자가방전되며,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마저 잃은 채 극심한 영혼의 피로를 겪고 있다.
이 고립과 피로의 그늘이 가장 짙게 드리운 곳은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노년층이다. 기술의 빠른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어르신들이 느끼는 정서적 단절과 ‘사회적 고립’, 나아가 고독사는 단순한 개인의 불행을 넘어선 사회적 경고다.
독일 막스플랑크 사회인류학연구소의 샹뱌오(項 ) 소장은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과 ‘초가속’의 혼란이 기술 자체 때문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기반인 ‘닻’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AI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인간이 권위와 규범을 답습하며 ‘AI를 흉내 내는 삶’을 살아왔다고 지적한 그는, 추상적인 매체에 휘둘리기보다 일상에서 이웃과 만나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구체적인 삶의 면역력’과 ‘연결망’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거센 문명사적 전환기 속에서 노년의 상처를 보듬고 삶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구체적 연결망을 통해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역사 속 소공동체들이 위기를 헤쳐 나온 지혜에 있다. 18세기 유럽의 ‘살롱(Salon) 문화’가 대표적이다. 계몽주의 시기 신분과 성별의 문턱을 허문 이 작은 모임들은 단순한 사교를 넘어, 근대 이행기의 인간성 상실에 맞서 대안적 담론을 자발적으로 형성해 낸 지적 공론장이었다. 볼테르와 루소 같은 사상가들의 성찰이 살롱이라는 토양 위에서 피어났듯, 대면의 만남은 위기의 순간마다 공동체를 지켜낸 힘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흐름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조선 시대 사림이 도입한 ‘향약(鄕約)’은 주민들이 모여 상부상조하며 도덕적·사회적 위기를 극복한 한국형 소공동체였으며, 가톨릭교회의 ‘기초교회공동체’ 운동 역시 삶과 신앙을 나누며 인간 소외에 맞선 연대의 보루였다.
오늘날 우리 지역 곳곳에서도 이러한 자발적 움직임들이 피어나고 있다. 영광 지역의 오래된 이웃 간 우애인 ‘띠앗’ 소모임, 최근 나주 다보사에서 시작된 공동체 회복 모임 ‘지혜의 뜰’, 지역 대학과 함께 하는 나주 카페 바실리에의 리빙랩 ‘바느질수다교실’, 마을공동체의 대명사인 ‘성미산마을’, 그리고 전국 각지의 민간 인문 독서 모임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는 기술 문명의 부작용과 노년의 외로움에 맞서 인간의 온기를 지켜내는 단단한 ‘현대판 살롱’이다.
문제는 현실의 정책이다. 현재의 노인 복지와 지자체 정책은 여전히 급식 지원이나 일회성 강좌 같은 수동적·시혜적 틀에 머물러 있어, 기술 격차로 노년층이 겪는 무력감과 정신적 피로를 보듬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이제 정책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거대한 기술의 파도와 초고령화 속에서 어르신들의 정서적 소외를 풀고 스스로 일어설 힘을 주려면, 이웃이 모여 온기를 나누는 소공동체 회복운동에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지자체와 복지 당국은 단순한 시설 건립을 넘어, 지역의 자발적 소공동체와 인문 살롱이 스스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공간, 프로그램, 정서적 네트워크를 적극 뒷받침해야 한다.
18세기 유럽의 살롱이 근대 사회의 새로운 길을 열었듯, 오늘 우리 곁의 작은 소공동체들은 기술 중심 사회에서 인간의 자리를 찾아주는 가장 확실한 동력이다. 남의 목소리나 AI를 흉내 내는 삶에서 벗어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삶의 고단함을 나누고 연대하는 일이야말로 노년의 고립을 막고 우리가 지켜내야 할 삶의 마지막 보루다. 소공동체 살롱들이 퍼뜨리는 따뜻한 온기가, 기술과 노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을 한층 더 단단하고 풍요롭게 가꿔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고립과 피로의 그늘이 가장 짙게 드리운 곳은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노년층이다. 기술의 빠른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어르신들이 느끼는 정서적 단절과 ‘사회적 고립’, 나아가 고독사는 단순한 개인의 불행을 넘어선 사회적 경고다.
독일 막스플랑크 사회인류학연구소의 샹뱌오(項 ) 소장은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과 ‘초가속’의 혼란이 기술 자체 때문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기반인 ‘닻’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AI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인간이 권위와 규범을 답습하며 ‘AI를 흉내 내는 삶’을 살아왔다고 지적한 그는, 추상적인 매체에 휘둘리기보다 일상에서 이웃과 만나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구체적인 삶의 면역력’과 ‘연결망’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거센 문명사적 전환기 속에서 노년의 상처를 보듬고 삶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구체적 연결망을 통해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역사 속 소공동체들이 위기를 헤쳐 나온 지혜에 있다. 18세기 유럽의 ‘살롱(Salon) 문화’가 대표적이다. 계몽주의 시기 신분과 성별의 문턱을 허문 이 작은 모임들은 단순한 사교를 넘어, 근대 이행기의 인간성 상실에 맞서 대안적 담론을 자발적으로 형성해 낸 지적 공론장이었다. 볼테르와 루소 같은 사상가들의 성찰이 살롱이라는 토양 위에서 피어났듯, 대면의 만남은 위기의 순간마다 공동체를 지켜낸 힘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흐름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조선 시대 사림이 도입한 ‘향약(鄕約)’은 주민들이 모여 상부상조하며 도덕적·사회적 위기를 극복한 한국형 소공동체였으며, 가톨릭교회의 ‘기초교회공동체’ 운동 역시 삶과 신앙을 나누며 인간 소외에 맞선 연대의 보루였다.
오늘날 우리 지역 곳곳에서도 이러한 자발적 움직임들이 피어나고 있다. 영광 지역의 오래된 이웃 간 우애인 ‘띠앗’ 소모임, 최근 나주 다보사에서 시작된 공동체 회복 모임 ‘지혜의 뜰’, 지역 대학과 함께 하는 나주 카페 바실리에의 리빙랩 ‘바느질수다교실’, 마을공동체의 대명사인 ‘성미산마을’, 그리고 전국 각지의 민간 인문 독서 모임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는 기술 문명의 부작용과 노년의 외로움에 맞서 인간의 온기를 지켜내는 단단한 ‘현대판 살롱’이다.
문제는 현실의 정책이다. 현재의 노인 복지와 지자체 정책은 여전히 급식 지원이나 일회성 강좌 같은 수동적·시혜적 틀에 머물러 있어, 기술 격차로 노년층이 겪는 무력감과 정신적 피로를 보듬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이제 정책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거대한 기술의 파도와 초고령화 속에서 어르신들의 정서적 소외를 풀고 스스로 일어설 힘을 주려면, 이웃이 모여 온기를 나누는 소공동체 회복운동에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지자체와 복지 당국은 단순한 시설 건립을 넘어, 지역의 자발적 소공동체와 인문 살롱이 스스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공간, 프로그램, 정서적 네트워크를 적극 뒷받침해야 한다.
18세기 유럽의 살롱이 근대 사회의 새로운 길을 열었듯, 오늘 우리 곁의 작은 소공동체들은 기술 중심 사회에서 인간의 자리를 찾아주는 가장 확실한 동력이다. 남의 목소리나 AI를 흉내 내는 삶에서 벗어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삶의 고단함을 나누고 연대하는 일이야말로 노년의 고립을 막고 우리가 지켜내야 할 삶의 마지막 보루다. 소공동체 살롱들이 퍼뜨리는 따뜻한 온기가, 기술과 노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을 한층 더 단단하고 풍요롭게 가꿔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