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없이 이름으로만 남은 전남 건준 부위원장 김시중
[노성태 원장의 남도인물열전]<84> 김시중

2026. 09. 30(수) 18:15 가+가-

사립 월평학교 교장 시절의 김시중


-영학숙에서의 인연, 인맥이 되다
한말 호남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사립 월평보통학교 설립, 신간회 장성지회장, 전남 건준 부위원장을 지내며 호남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살아낸 독립운동가가 있다. 만석꾼의 장남이라는 안락한 삶 대신 가시밭길 같은 항일 투쟁의 길을 선택한 장성 월평 출신의 김시중이 그다.

그는 해방 공간의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도 좌우의 벽을 넘어 평생의 동지를 지키다 비극적으로 스러져 간 민족 지도자이기도 했다.

무덤 없이 이름으로만 남은 독립운동가 김시중(金時中, 1892-1950), 하서 김인후의 12대손이고, 노사 기정진의 수제자로 고산서원에 배향된 김녹휴의 증손이다. 1892년, 만석꾼 김규익의 5남 중 장남으로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에 태어난다.

그가 태어난 월평은 1894년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이 중앙군을 격퇴했던 황룡촌 전투의 주 현장이기도 했고, 1944년 무등회 사건으로 옥사한 광주서중생 기환도(奇桓度, 1920-1944)의 고향이기도 했다.

김시중은 14살 때 담양군 창평면 상월정(上月亭)에 문을 연, 외국어 중심의 신학문을 가르쳤던 영학숙(英學塾)의 학생이 된다.

영학숙(英學塾)이 문을 연 상월정(담양군 창평면)


영학숙은 주로 영어 학습을 목표로, 규장각 직각(국립중앙도서관장 격)을 지낸 창평 출신 춘강 고정주가 사재를 털어 세운 호남 최초의 근대식 사숙(私塾)이었다.

영학숙이 문을 연 1906년 4월1일, 첫 학생은 고정주의 차남 고광준(24세)과 사위 김성수(15) 둘 뿐이었다. 2개월 후 담양군 금성면 출신의 송진우(16세)가 들어왔고, 이어 호남은행을 설립한 영암군 학산면 출신 현준호(17세)와 장성 황룡면 출신의 김시중(14세)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10세)가 입교하면서, 학생은 총 6명이 된다. 6명 중 고정주의 아들과 사위를 제외한 4명은 지인의 자제들이었고, 김시중의 예에서 보듯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특히 김성수는 집안의 조카이자, 친구 사이였다.

고정주가 서울에서 특별히 초대한 영학숙의 숙장(塾長, 교장) 이표는 영어는 물론 일어나 한문, 심지어 산술이나 지리, 역사, 체육에도 능통한 자로 알려지고 있다.

영학숙은 개교 8개월 만인 1906년 12월, 문을 닫는다. 그러나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등은 훗날 일본과 해외로 유학해 근대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으로 성장하는데 밑바탕이 됐고, 이때의 인연은 훗날 서로 의지하는 인맥이 된다.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던 김시중이 해방 이후 김성수·송진우가 중심이 된 우익계열의 한민당(한국민주당) 전남도당에서 위원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영학숙에서의 인연 때문이었다.


-사립 월평학교를 설립하다
영학숙이 문을 닫자 장성으로 돌아온 김시중은 1919년 3·1만세 시위를 목도한다. 인근 광주에서는 3월10일, 장성에서는 4월 3-4일 만세 시위가 전개됐지만, 당시 김시중의 참여 모습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1920년 12월,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 61-2번지에 사립 월평학교를 개교하고 교장에 부임하면서부터다.

사립 월평학교 기념비


월평학교 개교는 교장인 김시중이 4천원, 학교 재단 이사장 격인 교주(校主)를 맡은 당숙 김요중이 2천800원을 보태 관사 1동과 목조건물 9칸을 신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학교가 들어선 행랑채는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부친 김규익이 서당을 열어 민족교육을 펼치던 곳이었다. 서당에 대한 일제의 규제와 탄압이 강화되면서 민족교육의 요람인 행랑채 서당이 폐쇄되자 신식교육으로의 전환을 꾀한 것이다. 이때 일본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김요중이 나서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1922년 3월11일자 동아일보에 “사립 월평학교가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교장 김시중과 교원 김복수의 인솔로 졸업생도 17명을 인솔해 목포항을 견학하고 무사히 귀향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1904년 철도화물 운수업을 하던 서오순은 철도 주권을 지키기 위해 호남철도 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호남철도 부설권을 허가받았지만 1909년 일제 통감부에 의해 헐값에 강탈당한다.

철도 건설 자금이 부족했던 일제는 호남철도 주식회사의 주식을 산 김규익에게 애국공채 주식 공모를 강요했지만, 동학농민혁명군과 의병들에게 돈과 군량미를 대 주었던 김규익은 끝내 거절한다.

이에 일제는 1909년 10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라 불리는 전라도 의병 대토벌 작전이 끝나자마자 황룡강 둑을 따라 설계된 선로를 김시중의 집 중앙을 가로지르는 노선으로 바꾸는 만행을 저지른다. 일제에게 미운털이 박힌 ‘호남 명문가의 지맥 끊기’가 아닐 수 없다.

일제의 선로를 통한 ‘명문가의 지맥 끊기’로 잘 알려진 것은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다.

이상룡 일가가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한 것은 1911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것은 1925-1926년이었다. 그런데 중앙선 노선 계획은 1932년에 확정됐고, 임청각 앞으로 철로가 난 해는 1942년으로, 석주 이상룡이 이미 사망한 10년 후였다.

석주 이상룡의 행랑채를 헐리면서 개통된 중앙선은 이상룡이 사망한 뒤였지만, 만석꾼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김규익의 행랑채와 안채 사이에 놓인 호남선은 1914년으로, 일제에게 밉보인 결과였다.

호남선 철로가 김시중의 99칸 집을 갈랐고 행랑채에서 9칸 교실로 출발했던 사립 월평학교는 1922년 일제의 유화책이었던 2차 교육령이 실시되면서 탄압을 받는다. 학교의 수업 내용에 반일 사상이 포함돼 있다는 이유였다,

1924년 2월, 공립 월평보통학교가 인가를 받자, 김시중은 사립 월평학교의 졸업생을 모두 광주사범학교에 입학시킨다는 조건을 달고 공립 월평보통학교로의 전환을 수락했다. 3회 졸업생을 배출한 사립 월평학교가 공립 월평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게 된 연유다.

월평초등학교 100주년 기념비


1920년대 초 사립 월평학교 전경(가운데가 김시중 교장)


김시중이 건립한 사립 월평학교는 공립 월평보통학교를 거쳐 지금 월평초등학교가 됐고, 2020년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진다.

월평초등학교 운동장 한켠에는 ‘월평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비’가, 반대편 운동장에는 1924년에 학부모와 지방 유지, 교원과 생도 일동이 설립자 김시중과 김요중의 이름을 새긴 ‘사립월평학교기념비’가 세워져, 건립 당시 김시중의 역할을 기리고 있다.


-신간회 장성지회장에 선출되다
김시중의 교육 사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는 서울에서의 신간회 결성 소식을 듣는다. 1927년 2월 결성된 신간회(新幹會)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해 창립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항일 민족협동전선(좌우합작) 단체였다.

신간회 결성 소식이 전해지자, 동년 12월 김시중은 자신의 사랑채에서 신간회 장성지회를 결성했고, 장성지회는 김시중을 회장으로, 송종근을 부회장으로 추대했다.

송종근은 장성 지역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고, 월평으로 이사 오면서 김시중과는 평생 동지가 된다.

신간회 장성지회가 결성된 직후인 1928년 2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나승규와 송종근 등은 장성 농민조합을 결성했다. 이후 장성 지역의 사회운동은 신간회와 농민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장성 지역에서 김시중과 송종근 등의 사회 활동이 치열할수록, 일제의 탄압도 가중됐다.

1929년 1월, 신간회 장성지회 부회장 송종근이 내외정세에 관한 유인물을 작성, 배포했다는 이유로 구속됐고, 김시중 등 신간회 장성지회 간부 5명도 구속됐다. 이 사건으로 김시중은 3년의 집행 유예를 선고받는다.

1931년 5월, 신간회는 사회주의 진영이 주도하게 되고 좌우 갈등이 심화되면서 해체된다.

서울의 신간회가 해체되자, 장성지회도 대세에 밀려 해체를 결정한다.

신간회가 해체되자 김시중은 또 다른 형태의 항일운동을 전개했는데, 1931년 신간회 장성지회와 장성 농민조합 등에서 활동하던 항일 운동가들이 주도한 장성협동조합 운동이었다.

김시중은 장성협동조합의 설립과 운영을 돕다 나승규 등과 함께 또다시 구속됐지만, 무죄로 방면된다.

1935년, 풀려난 김시중은 양태승, 조상항, 송종근, 최현 등과 함께 광주에 무등양말 공장을 설립하는데 대주주로 참여해 초대 대표로 취임했다.

양말을 팔아 얻은 수익으로 조선 민중의 생계를 안정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운영 미숙과 자금난이 겹치면서 1937년 고광표에게 팔리고 만다. 이 무렵 김시중의 재산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전남 건준 부위원장에 선출되다
해방 직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회(건준)가 결성되자, 1945년 8월17일 광주극장에서 전남 건준이 결성된다. 이때 김시중은 강해석과 함께 부위원장에 선출됐는데, 위원장은 오방 최흥종이었다.

김시중은 서울의 중앙 건준에 신임장 수령을 위해 파견된 5명의 대표였으며, 신임장 수령에 실패한 후 서울지역 정세를 살피기 위해 남은 2명 중 한 명이었다. 다른 한 명은 김시중 등이 중심이 돼 만든 무등양말 공장을 인수한 전남 건준의 재무부장 고광표였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이때 김시중은 서울에서 김성수, 송진우 등을 만나 한민당 결성 소식을 전해 듣고, 후일 한민당 중앙위원과 전남지부장을 맡는다. 그가 좌파 진영에서 우파 진영으로 적을 옮긴 셈인데, 이는 어린 시절 창평의 영학숙에서 같이 공부했던 인연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 김시중은 이미 살핀 것처럼 전남 건준 부위원장이었고, 한민당의 전남도당 위원장이었다. 그리고 6·25 전쟁을 맞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김시중은 6·25 전쟁 직후 일제강점기 시절 ‘장성협동조합 사건’ 등을 주도했던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독립운동 이력 때문에 예비 검속돼 광주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인민군이 내려오자, 대한민국 치안국은 보도 연맹원들과 함께 법적 절차 없이 집단 학살했는데, 그 속에 김시중도 포함돼 있었다. 오늘 그의 무덤조차 남아 있지 않은 이유다.
노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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