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이삭꽃 / 수필 - 허문정
- 재생 준비중
2024. 11. 11(월) 19:30 가+가-
연세가 많은 분의 등을 밀어 드렸다.
흘깃 가슴팍을 보니 돌보지 않은 무덤처럼 젖가슴이 낮게 내려앉았다. 건포도 같은 젖꼭지가 생의 꼬투리인양 달려있다. 긴 여정의 마침표 같기도 하고 욕망의 마지막 징표로도 보였다. 고개 숙인 이삭 같은 모습에서 순간 꽃의 의미가 다가왔다.
이게 바로 ‘이삭꽃’이구나!
잘 여문 이삭은 생의 마무리이자 눈부신 완성이다. 그 자체로 풍요이며 만족이다. 완숙한 몸이 유용하게 쓰이길 바라며, 새봄에 싹을 틔울 희망의 기다림이다. 하지만 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여인네의 젖꼭지는 완숙의 느낌을 넘어 처연함으로 다가왔다. 떨어져 거름이 되기 위한 무표정한 순종, 그 비움이 쓸쓸하게 느껴져 삼천 년에 한 번씩 핀다는 우담바라처럼 고귀한 꽃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살아온 날을 감사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어린 날, 추수가 끝난 논바닥에서 벼 이삭을 주워보았다. 그때 벼이삭에서 싹이 튼 것을 보았다. 가을이지만 한 번 더 싹을 틔워 결실을 보여줄 심산이었을까. 임종하는 자리에서 입만 달싹거리는 사람처럼 벼 이삭이 틔운 싹은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벼이삭이 보여준 새싹은 자기 존재의 마지막 확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난(蘭)도 너무 보대끼면 본능을 다하여 꽃을 피운다고 한다. 자기의 소진에 대한 절박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젖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병이 깊어진 뒤였다. 희던 젖가슴이 바위처럼 변해 생을 무겁게 눌러 버렸다.
염을 하며 어머니의 몸을 보았다. ‘우리 엄마 참으로 곱다’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주검을 두고 곱다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만 어머니는 정말 고왔다. 여자의 몸은 무조건 가리라고만 한 어머니, 생전의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속 몸은 젖가슴이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 동생에게 젖을 먹일 때면 과장 없이 젖통이 아기 머리만이나 했다. 젖이 줄줄 흘러나와 수건을 받쳐놓기도 하던 어머니의 가슴은 이때가 아마 가장 환하던 시기였으리라.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을 보면 젊은 여인이 늙은 남자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언뜻 보면 외설적 표현에 불쾌한 느낌마저 든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딸 사이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연을 들여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젊은 여자가 딸 페로이고 늙은 남자는 아버지 키몬이다. 아버지는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있다. 처형되는 날까지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굶주리며 죽어가는 아버지가 안타까워 딸이 몰래 감방에 들어 젖을 먹인다. 효를 다 하는 그녀의 안간힘이 영락없는 한국판 심청이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여자의 젖은 거룩한 생명수다. 가슴에 고인 흰 젖으로 모성애의 극치를 보여준다. 여인의 젖은 그 자체로 성체이며 세상 만물의 어머니이다.
삶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어머니의 젖이 흘러넘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한쪽 젖은 물고 한쪽은 두 손으로 감싸안아 생애 최고의 성찬을 만끽하고 싶다.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눈 속에 내 눈 쏙 집어넣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면…. 젖가슴이 아프지 않은 그 환하던 시절로 어머니를 돌려드리고 싶다. 청상의 외동딸로 자라 홀시어머니를 모시는 가난한 집 맏며느리였고, 결혼할 당시의 아버지는 철부지 고등학생이었으니 마음속 응어리가 얼마나 깊었을까. 속 시원히 울어보지 못한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먹이던 순간만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애써 ‘이삭꽃’이라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몫을 성실히 살아내고 몸 가벼워진 여인의 젖꼭지를 바라보는 내 눈이 시렸다. ‘자네 피부색이 참 곱네!’ 하며 자신의 젊은 날은 한사코 아끼는 그 말속에 상념과 연민이 스민듯해 등을 미는 두 손에 정성을 다했다. 기름기라고는 없는 살가죽이 이리저리 밀렸다. 생의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헌신하신 그분 앞에 두둑한 내 뱃살이 송구스러웠다.
머잖은 날에 내 가슴에도 초겨울의 스산함이 찾아오리라. 하지만 그날을 쓸쓸해하거나 회한에 젖지 않겠다. 아니 마른 젖꼭지를 ‘이삭꽃’이라 당당히 내밀어 보이며 자랑스러워하겠다. 내가 이름 짓고 내가 피워 올린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꽃, ‘이삭꽃’을!
*이삭꽃 명사, 식물 ‘수상화’와는 별개로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가상의 꽃
<허문정 약력>
▲월간문학 수필등단, 시와사람 시 등단
▲시집 : ‘어린 애인’, ‘꽃눈을 따다’
▲수필집 : ‘눈썹을 밀며’
흘깃 가슴팍을 보니 돌보지 않은 무덤처럼 젖가슴이 낮게 내려앉았다. 건포도 같은 젖꼭지가 생의 꼬투리인양 달려있다. 긴 여정의 마침표 같기도 하고 욕망의 마지막 징표로도 보였다. 고개 숙인 이삭 같은 모습에서 순간 꽃의 의미가 다가왔다.
이게 바로 ‘이삭꽃’이구나!
잘 여문 이삭은 생의 마무리이자 눈부신 완성이다. 그 자체로 풍요이며 만족이다. 완숙한 몸이 유용하게 쓰이길 바라며, 새봄에 싹을 틔울 희망의 기다림이다. 하지만 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여인네의 젖꼭지는 완숙의 느낌을 넘어 처연함으로 다가왔다. 떨어져 거름이 되기 위한 무표정한 순종, 그 비움이 쓸쓸하게 느껴져 삼천 년에 한 번씩 핀다는 우담바라처럼 고귀한 꽃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살아온 날을 감사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어머니의 젖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병이 깊어진 뒤였다. 희던 젖가슴이 바위처럼 변해 생을 무겁게 눌러 버렸다.
염을 하며 어머니의 몸을 보았다. ‘우리 엄마 참으로 곱다’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주검을 두고 곱다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만 어머니는 정말 고왔다. 여자의 몸은 무조건 가리라고만 한 어머니, 생전의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속 몸은 젖가슴이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 동생에게 젖을 먹일 때면 과장 없이 젖통이 아기 머리만이나 했다. 젖이 줄줄 흘러나와 수건을 받쳐놓기도 하던 어머니의 가슴은 이때가 아마 가장 환하던 시기였으리라.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을 보면 젊은 여인이 늙은 남자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언뜻 보면 외설적 표현에 불쾌한 느낌마저 든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딸 사이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연을 들여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젊은 여자가 딸 페로이고 늙은 남자는 아버지 키몬이다. 아버지는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있다. 처형되는 날까지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굶주리며 죽어가는 아버지가 안타까워 딸이 몰래 감방에 들어 젖을 먹인다. 효를 다 하는 그녀의 안간힘이 영락없는 한국판 심청이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여자의 젖은 거룩한 생명수다. 가슴에 고인 흰 젖으로 모성애의 극치를 보여준다. 여인의 젖은 그 자체로 성체이며 세상 만물의 어머니이다.
삶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어머니의 젖이 흘러넘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한쪽 젖은 물고 한쪽은 두 손으로 감싸안아 생애 최고의 성찬을 만끽하고 싶다.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눈 속에 내 눈 쏙 집어넣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면…. 젖가슴이 아프지 않은 그 환하던 시절로 어머니를 돌려드리고 싶다. 청상의 외동딸로 자라 홀시어머니를 모시는 가난한 집 맏며느리였고, 결혼할 당시의 아버지는 철부지 고등학생이었으니 마음속 응어리가 얼마나 깊었을까. 속 시원히 울어보지 못한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먹이던 순간만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애써 ‘이삭꽃’이라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몫을 성실히 살아내고 몸 가벼워진 여인의 젖꼭지를 바라보는 내 눈이 시렸다. ‘자네 피부색이 참 곱네!’ 하며 자신의 젊은 날은 한사코 아끼는 그 말속에 상념과 연민이 스민듯해 등을 미는 두 손에 정성을 다했다. 기름기라고는 없는 살가죽이 이리저리 밀렸다. 생의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헌신하신 그분 앞에 두둑한 내 뱃살이 송구스러웠다.
머잖은 날에 내 가슴에도 초겨울의 스산함이 찾아오리라. 하지만 그날을 쓸쓸해하거나 회한에 젖지 않겠다. 아니 마른 젖꼭지를 ‘이삭꽃’이라 당당히 내밀어 보이며 자랑스러워하겠다. 내가 이름 짓고 내가 피워 올린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꽃, ‘이삭꽃’을!
*이삭꽃 명사, 식물 ‘수상화’와는 별개로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가상의 꽃
<허문정 약력>
▲월간문학 수필등단, 시와사람 시 등단
▲시집 : ‘어린 애인’, ‘꽃눈을 따다’
▲수필집 : ‘눈썹을 밀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