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깎다가 손을 베었다. 대단찮은 상처라서 금방 피가 멎었는데 핏자국을 닦노라 물을 채운 그릇에 손을 담그자 다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흐르다가 물과 섞이면서 좀 더 엷고 부드럽게 퍼져 나가며 점차 물을 분홍빛으로 물들여 가는 과정이 하도 은근하고 아름다워 지혈할 생각도 잊고 취한 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물의 무색투명한 정결함과 피의 붉은 색이 만나 만드는 그 스밈과 번짐의 신비한 작용은 상처의 쓰라림쯤은 너끈히 잊게 했다.

남다른 재능이나 심미안도 없으면서 수채화에 심취하여 아는 이의 화실을 드나들던 적이 있다. 수채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에는 경계가 없었다. 아무리 강렬한 색일지라도 물을 만나는 순간 그 경계를 허물며 은근하게 융화했다. 나는 산과 들과 나무와 사람이, 천지간의 기운들이 그들대로 존재하며 완강함을 지우고 거부감이 한 호흡을 이루는 조화를 보며 모든 만남의 궁극적 이상을 그곳에서 발견했던 것 같다. 진정한 만남이란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의 마음과 감정이 자유롭게 스미고 넘나들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이 아닌가.

살아가는 순간순간 많은 것들과 만난다. 알거나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 낯설거나 낯익은 정경들을 만난다.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신과 만나고 오욕칠정의 복잡한 감정들과 맞닥뜨린다. 이것들의 제어할 수 없는 넘나듦으로 생의 무늬들은 쌓이고 짜여진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가 바라보는 것을 닮는단다. 나무는 하늘을 향해 위로 키를 키우고 바위는 태양을 좆아 몇 만 년 세월의 공을 들여 둥글게 닮아 간다. 연인들의 포옹, 사위어 가는 마지막 햇빛과 피어오르는 어둠이 서로 몸을 섞는 노을빛, 물을 향해 달려간 파도가 포말로 스러지며 스미는 모래벌의 자취 등. 만남에의 희원과 그리움의 몸짓치고 아름답고 눈물겹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멀리 떨어져 있는 꽃들은 꿀과 향기로 벌 나비를 불러 사랑의 전령으로 삼고, 시인은 천지에 내리는 눈을 모든 그리운 것들이 돌아와 내리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한 송이의 들꽃에서 섭리와 이치를 생각하고 생의 은유를 발견하노라면, 그 거대하고 확실한 질서 속에 편입된 나의 존재에 가슴 떨리지 않은 자 누구일까.

아메리카 인디언들 중 한 종족은 ‘깨어져 조각난 거울의 파편들을 모아 흠 없이 온전한 원래의 둥근 모양을 회복시키는 것’이 인생의 성취이고 목표라고 말한다. 완벽한 만남과 끝없이 이어지는 순환고리를 뜻하는 듯하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노인이 함께하는 정경은 아름답고 의미심장하다. 탄생과 죽음이 생장과 노쇠가 아무런 충돌도 단절도 없이 하나로 이어져 순환하는 모습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죽는다거나 세상을 떠난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인 ‘돌아간다’는 말에는 자연과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질서와 섭리 속에서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준다.

숨을 고르고 모아 상처 난 손끝으로 보내본다. 솟구치는 한 방울의 피, 스민다. 물의 너그러움, 합일이다.

<박영덕 약력>
▲1992년 ‘월간문학’ 등단
▲한국문협 이사, 국제펜광주위원회 부이사장
▲광주문협 수석부회장
▲현대그룹문학상, 광주예총문화예술대상, 박용철문학상, 조연현문학상, 광주문학상, 대한문학상 수상
▲수필집 : ‘달개비꽃에는 상아가 있다’, ‘말씀의 우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