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으로 출렁이던 들녘이 속살을 드러냈다. 텅 빈 들녘에는 억새만이 외롭게 하늘거린다. 들녘의 여백 위에 붉은 산이 파스텔화처럼 펼쳐진다.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빠져든다. 가을이 깊어지고, 가을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의 마음도 깊어진다.

만추의 여정을 무주로 잡았다. 광주에서 무주를 향해 달리다보면 차창 밖으로 수많은 산이 스쳐지나간다. 지리산은 물론이고 황석산, 덕유산 같은 명산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덕유산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가파르고 육중한 적상산이 눈앞에 나타난다. 적상산은 단풍이 붉게 물들어 붉은 치마를 두른 듯하다. 그래서 산 이름이 적상산(赤裳山)이다.

727번 지방도로에서 북창천 깊은 골짜기를 따라 달려가니 별천지 같은 조그마한 마을이 나온다. 해발 350m에 자리한 북창리 내창마을이다. 내창마을은 옛날 적상산사고를 지키던 승병들을 위한 곡식·병참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다. 적상산에는 동서남북 네 곳에 창고가 있었다.

내창마을을 지나면서 경사는 점점 급해지고 구절양장 같은 도로가 이어진다. 도로를 감싸고 있는 단풍나무와 은행나무는 단풍터널을 이뤘다. 적상터널을 통과해 몇 구비 돌아가니 적상호라 불리는 산정호수가 기다리고 있다. 해발 850m에 자리하고 있는 적상호는 1992년 양수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해발 850m에 자리한 적상호 수변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단풍길은 다양한 색상으로 물든 단풍이 아름다운 길이다.

호숫가 도로변에는 단풍이 붉은 띠를 이뤘다. 적상산전망대까지 자동차로 갈수 있지만 우리는 적상산사고 근처 주차장에서부터 갓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호숫가를 따라 이어지는 단풍은 다양한 색상으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진홍색에서부터 다홍색, 노랑색 단풍은 물론 단풍물이 덜 들어 초록빛을 띤 것까지 다양한 색상을 이루고 있다.

단풍길을 따라 적상산전망대에 도착했다. 이 전망대는 무주양수발전소의 조압수조를 개조해 만들었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사방으로 트인 풍경이 압권이다. 만산홍엽을 이룬 산들이 첩첩하게 다가오고, 산골짜기와 산봉우리들은 음양의 조화를 이뤘다. 산골짜기에는 농경지와 마을이 자리를 잡아 정감을 더해준다. 무주읍내의 건물들도 모습을 드러낸다.

남쪽에서는 덕유산이 거대한 산줄기를 이어가고 그 앞으로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붕긋붕긋 솟아있다. 무주양수발전소의 하부댐인 무주호도 산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무주양수발전소는 하부저수지인 무주호에서 상부저수지 적상호로 물을 끌어올려 발전하는 시스템이다.

적상산전망대에서는 무주양수발전소의 하부댐인 무주호도 산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무주양수발전소는 하부저수지인 무주호에서 상부저수지 적상호로 물을 끌어올려 발전하는 시스템이다.

적상호에서 고도차가 200m도 채 되지 않는 적상산 정상(1034m)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바라보인다. 적상산 정상에서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완만하고 부드럽지만 서쪽과 북쪽 비탈은 가파른 절벽을 이룬다. 이 산의 가을단풍을 붉은 치마에 비유하곤 하지만, 적상산이라는 이름은 본디 붉은색 절벽으로 둘러싸인 모습에서 비롯됐다.

적상산전망대에서 내려와 적상산사고 방향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적상호 수변도로 위쪽에 적상산사고지유구가 자리하고 있다. 묘향산사고에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을 1614년(광해군 6)과 1634년(인조 12) 두 차례에 걸쳐 적상산사고로 옮겨왔다. 이를 위해 1614년 실록각을, 1641년(인조 19)에는 선원각을 건립했다.

묘향산사고에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을 1614년(광해군 6)과 1634년(인조 12) 두 차례에 걸쳐 적상산사고로 옮겨왔다. 이를 위해 1614년 실록각을, 1641년(인조 19)에는 선원각을 건립했다.

적상산사고에 보관된 서책들이 1910년 서울로 옮겨가고, 적상산사고가 있던 자리도 1992년 무주양수발전소 상부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돼 현재 위치로 주춧돌 등 유구가 옮겨졌다. 이후 1997년 선원각, 1998년 실록각을 복원하여 옛 적상산사고의 모습을 갖췄다.

적상산사고에서 안국사로 향한다. 안국사에 가까워지자 적상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적상산성은 사적 제146호로 둘레가 약 3㎞에 이른다. 적상산성은 고려 말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적상산성은 안국사 앞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숲속에서 겨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안국사에 가까워지자 적상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적상산안국사 일주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청하루(靑霞樓)를 통과하자 정면에 극락전이 덕유산 정상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극락전 아래 마당 양쪽에 성보박물관과 범종각 등이 자리하고, 극락전과 같은 높이로 나란히 삼성각과 명부전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 안에는 보물 제1267호인 영산회괘불탱이 있다. 괘불탱은 1728년(영조 4)에 제작되었고, 크기는 가로 7.25m, 세로 10.75m에 이른다.

1277년(충렬왕 3)에 월인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안국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는 승병의 숙소로도 사용됐다. 지금 안국사가 자리한 곳은 옛날 호국사가 있던 곳이다. 무주양수발전소 건설로 원래의 안국사가 물에 잠기게 돼 호국사지로 옮겨왔다.

1277년(충렬왕 3)에 월인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안국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는 승병의 숙소로도 사용됐다.

안국사는 해발 960m에 이르는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어 적상산 정상과의 고도차가 70여m에 불과하다. 안국사를 출발해 안렴대로 향한다. 주능선에 올라서니 안렴대 0.3㎞, 향로봉 1.5㎞라 쓰인 이정표가 서있다. 안렴대에 도착하자 만산홍엽을 이룬 적상산 모습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오죽했으면 붉은 치마(赤裳)를 두른 산이라고 했을까? 붉게 보이는 단풍은 빨강에서 시작해 갈색, 다홍색, 노랑색 등 그 색상이 다채롭다. 적상산이 오색단풍으로 물들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산 공화국을 이룬 풍경이 깊이를 더해준다. 주변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덕유산 능선이 유장하게 펼쳐진다. 첩첩한 산속에 서 있으니 거대한 자연 앞에서 한 인간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안렴대는 절벽을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 거란이 침입했을 때 삼도의 안렴사가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진을 치고 난을 피한 곳이라 하여 안렴대라 불렀다. 병자호란 때는 한 스님이 적상산사고의 실록을 안렴대 밑에 있는 석실로 옮겨와 숨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안렴대에서 안국사삼거리까지 되돌아 나와 향로봉으로 향한다. 안국사삼거리에서 가까운 적상산 정상(1034m)에는 통신시설이 있어 밟지 못하고 지나간다. 능선 주변의 울창한 활엽수들은 잎을 떨구고 겨울 날 준비를 마쳤다. 떠나야할 때가 되면 미련없이 자신을 버리는 나뭇잎을 생각하니 한 치의 욕망도 버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향로봉삼거리는 서창마을에서 올라오는 등산로가 만나는 곳이다. 삼거리에서 완만한 경사의 등산로를 따라 500m 쯤 올라가니 향로봉(1024m)이다. 향로봉에서 오던 길을 되돌아 안국사로 내려온다. 적상호주차장까지 내려오니 적상호를 감싸고 있는 단풍이 여전히 아름답다. <장갑수·여행작가>

※여행쪽지

▶적상산은 이름 그대로 단풍이 아름다운 산이다. 산 아래에서부터 가파른 비탈을 올라야하는 등산로가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코스가 있다. 산 동쪽 8부 능선에 있는 적상호까지 자동차로 올라가 고도차가 200m도 나지 않는 적상산을 오르는 코스가 그것이다.
※코스 : 적상호주차장→적상산전망대→적상산사고→안국사→안렴대→향로봉→안국사→적상호주차장
※거리, 소요시간 : 8.3km, 3시간 30분 소요
※출발지 내비게이션 주소 : 적상호주차장(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산 1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