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나를 좀 꼭 안아줘요” / 수필 - 김재유
2022. 05. 02(월) 19:43 가+가-
다섯 살 때 병을 앓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남자와 그의 아내, 네 살 된 딸 세 식구가 단칸방에서 오손도손 살고 있었다. 얼마 전 임금도 받지 못하고 실직한 남편이기에 가장 노릇을 하며 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것은 만삭이 된 아내 몫이었다. 글을 모르는 남편이 일자리를 찾아 집을 나설 땐 도움이 될 편지를 써주고 딸과 함께 격려의 미소도 잊지 않는 그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수술로 두 번째 딸을 분만했다. 그녀가 마취에서 깨어난 순간 첫 마디는 ‘여보 나 좀 꼭 안아줘요’였다. 그때 옆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던 남편은 아내의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안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흐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TV 다큐멘터리 ‘탄생’의 장면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침묵의 언어와 그 몸짓이 한데 어우러진 최상의 표현, 그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보통의 부부라면 그냥 흘려버릴 수 있는, 아니 얼굴 붉어질 일이라고 치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친정 부모, 형제마저 외면했던 춥고 외로운 그녀의 결혼생활은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나 좀 꼭 안아줘요’는 어떤 의미였을까. 고달픈 삶, 그래서 흔들리는 자기의 마음을 붙잡아 달라는 것이었을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능력 없는 남편에 대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응석을 부리며 호사를 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그녀의 말속에서 때묻지 않은 겸손과 계산되지 않은 사랑, 희생을 강요하지 않은 헌신, 지식으로 치장되지 않은 지혜를 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감동을 받았던 것은 사랑을 공유할 줄 아는 그녀의 슬기로움이었다. 부부간의 사랑이란 넘치거나 부족하면 어느 한쪽이 일방적이 되기 쉽고, 그 일방적인 것은 함께 나누는 행복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랑이란 희생과 동정으로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남편을 위하여 어린 딸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곱고 예뻐서 보는 이로 하여금 왠지 슬픔을 느끼게 했다. 나는 생활 속에서 한 편의 시를 감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무심코 흘려낸 일상의 말에도 이렇듯 아름다운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어찌 좋은 말만 할 수 있으랴. 가슴에 쌓인 앙금을 씻어낼 원망이나 투정, 자책의 말도 필요한 것을. 말이란 이미 공중으로 내던져지면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무형의 실체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받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면죄부를 주기도 하고, 말하는 사람에게 부메랑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햇빛처럼 따스한 온기로 얼음을 녹아내리듯 감싸기도 하고, 사나운 광풍으로 흔들리다가 썩어있는 나뭇가지뿐 아니라 싱그럽게 숨 쉬고 있는 가지를 내리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끊임없이 말을 하면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을 표출한다. 어쩌면 말을 하지 않고 산다면 마음의 병이 생길지 모른다. 가끔은 세상 속의 나도 내 언어가 닿는 영역, 그만큼일 것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말을 배우기 시작했던 기억은 할머니 무릎 위에서였다. 할머니는 내 얼굴 이목구비며 신체의 부분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말을 가르쳐 주셨다. 내 이름 석 자, 그 존재의 뿌리도 자랑스럽게 일러 주셨다. 그렇게 움을 트던 말의 시작이 생각의 폭만큼 확장되어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견 발표가 있었다. 교문 앞에 트럭을 세워놓고 연사들의 찬조 연설이 있었는데 어떤 중년 여성의 열변에 나는 매료당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웅변을 배우기 시작했다. 7분간의 원고지 분량엔 서너 번의 클라이맥스 부분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청중의 박수를 유도하는 폭포수 같은 열변을 토해내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술일 뿐 말을 잘하는 것하고는 별개라는 사실을 얼마큼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말을 조리 있게 잘한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그러나 진실이 없고 철학이 없는 말은 생명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오히려 말을 노련하게 잘하는 사람보다는 어눌한 말투로 실수를 하는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느낄 때가 있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여 중립을 지키다 보면 진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고, 감정에 너무 치우치다 보면 사실이 과장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말에 너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말이란 살아가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한 마음이 바탕에 있다면 말의 형태야 어떻든 큰 허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말들이 넘쳐난다. 듣기 좋고 향기로운 말은 후덕함일 것이고, 남의 잘못도 진실에 입각해서 한다면 용서하겠다는 여백이 있어 아름다운 언어라 말하고 싶다.

<김재유 약력>
▲ ‘수필과 비평’ 신인상
▲ 광주 문인협회 이사
▲ 남도수필 문학회 회원

박덕은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전남대 교수 역임
▲중앙일보 신춘문예당선

- 평 설(박덕은 문학평론가) -
김재유 님의 수필 ‘나를 좀 꼭 안아줘요’에서의 서술자는 TV다큐멘터리 ‘탄생’을 보고, 생각의 문을 연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남편, 어린 딸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엄마, 둘째 딸을 분만할 때 남편에게 ‘여보 나 좀 꼭 안아 줘요’라고 말한 아내. 이를 소재로 서술자는 말의 의미를 유추해 낸다. E.라스는 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말도 아름다운 꽃처럼 그 색깔을 지니고 있다.” 말이란 자신의 삶을 마음으로 콕 찍어 입술 위에 얹어 놓는 것이다. 그러기에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그리운 과거와 현재의 생생함이 입안을 감돌게 한다. 마취에서 깨어난 아내가 남편에게 건넨 그 말에 꽃향기가 가득하다. 그 꽃향기에 서술자도 흠뻑 젖어 든다. 힘든 삶의 궤도에 뛰어들어 운명을 끌어안는 저 여인을 바라보는 서술자의 시선이 아름답다. 목숨을 위협하는 칼바람 같은 세상 속에서도 환한 사랑의 꽃을 피우는 여인의 말과 남자의 침묵 언어 그리고 가슴 절절한 포옹에 서술자는 감동한다. 그러면서 ‘나 좀 꼭 안아 줘요’라는 말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고달픈 삶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 달라,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능력 없는 남편에 대한 배려, 때 묻지 않는 겸손, 계산되지 않은 사랑,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헌신, 지식으로 치장되지 않는 지혜 등의 의미를 서술자는 이끌어 내고 있다. 이어 할머니에 대한 추억, 국회의원 선거 찬조 연설자의 웅변에 대한 감동 등을 통해 열변에 대한 동경, 진실이 없고 철학이 없는 말과 어눌한 말투이지만 인간적인 면을 느끼게 하는 말, 진실한 마음이 바탕에 깔린 말, 향기로운 말 등에 대한 사색까지 골고루 다뤄 놓고 있다. 말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어, 행복하다. 말(言)은 눈에 보이지 않게 떠도는 무형의 유목민 같아서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부족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삶 속에 뿌리내린 말을 되돌아보게 하는 수필이라서 더욱 마음이 정화되고 고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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