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어머니와 냄비 / 수필 - 정명희


- 재생 준비중
2026. 10. 05(월) 19:43 가+가-
친정 부엌 한쪽 구석에 냄비가 놓여 있다.
언제부터 저 자리에 있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세월에 닳아 때깔도 없고, 손잡이도 헐거워졌다. 바닥에는 오래 불에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다. 한때는 반짝반짝 빛났을 냄비가 이제는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두 손을 놓고 한가롭게 쉬고 있다.
저 냄비를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의 많은 추억들이 떠오른다. 이 냄비는 지지고 볶고 끓이고 데우며 식구들의 밥상의 중심을 차지했다. 식구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어머니는 냄비부터 불 위에 올렸다. 아침이면 밥 냄새가 났고, 저녁이면 국 끓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맛있는 것을 해 먹는 날이면 냄비 뚜껑이 먼저 들썩였다. 그 모든 소리 뒤에 어머니와 냄비는 우리 집 부엌 한가운데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 무엇을 먹었는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냄비 바닥에 밴 흔적만큼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어느 날 대전에 사는 막내가 새 냄비를 사 가지고 왔다.
“엄마, 이거 새로 쓰세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냄비였다.
그런데 막내는 헌 냄비를 보자기에 싸기 시작했다.
“그건 뭐 하려고?”
“내가 가지고 갈게.”
“어디다 쓰려고?”
“캠핑할 때 쓰려고.”
나는 헌 냄비를 한 번 쳐다보고 막내를 쳐다봤다.
“요즘 누가 그런 걸 캠핑에 쓰겠냐?”
“걱정 마소.”
막내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날 저녁 막내에게서 사진 한 장이 카톡으로 왔다. 나는 사진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삼부자가 나란히 서서 냄비를 쓰고 있었다. 헌 냄비가 모자가 되어 있었다. 헐거워진 냄비가 머리 위에 얌전히 올라가 웃음을 퍼내다니, 이게 캠핑용 냄비라더니, 허 참. 나는 어머니에게 사진을 보여드렸다. 어머니도 한참을 들여다보시더니 웃으셨다.
“왜 가지고 갔는가 했더니 잘 어울린다.”
“엄마, 이런 모자가 세상 어디에 있어.”
“그려 냄비가 울 손자들 머리에 올라가 부렀으니 출세했다.”
“오메, 맞네, 우리 엄마 부녀회장 하듯이, 저 냄비가 출셋길이 환해 부렀구만.”
부엌에 있을 때 낡고 볼품없어 보이던 냄비다. 그런데 아이들 머리 위에 올라가 있으니 전혀 다른 물건처럼 보였다. 나는 그제야 냄비가 우리 집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생각했다. 어머니가 부녀회장을 맡아 하시면서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식생활 개선 교육 있는 날은 집을 교육 장소로 내어주기도 했다. 교육이 끝난 뒤 어머니는 우리 먹을 간식을 챙기셨다. 그때도 냄비는 어머니 곁에서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어머니가 새 냄비를 보며 말했다.
“예전 것이 좋구만 뭐하려고 바꿨는가 모르겠다.”
“엄마! 세련되고 좋구만.”
“아이구 세련이 두 번만 쳤다가는 우리 집 냄비 다 바꾸겠다.”
어머니의 말씀에 또 웃었다.
새 냄비는 반짝이고 깨끗했지만, 어머니 손에는 아직 헌 냄비가 남아 있었다. 어쩌면 새 냄비에는 없는 것이 헌 냄비에 너무 많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막내는 집에 왔다 가면 그냥 가지 않는다. 문짝이 삐걱거리면 손보고, 망가진 것이 있으면 고쳐놓고 간다.
“엄마는 좋겠어.”
어머니는 전화로 그것을 하나하나 자랑하듯 이야기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꼭 한마디를 덧붙인다. 좋아서 하는 자식의 일을 굳이 말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마음 놓고 좋아하지도 못하는 목소리다.
“애쓴다.”
나는 어머니의 부엌을 자주 다니며 정갈하게 치운다. 어머니가 평생 우리에게 해준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어머니에게 물어봐도 아마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그 시절을 지나온 냄비만큼 손바닥은 닳고 세월의 주름이 남았다. 어머니 삶이란 손때 묻은 가족의 체취를 맡으며 행복을 채워내셨다. 어쩌면 냄비의 쓸모는 끝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손에서 손자의 머리로, 부엌에서 캠핑장으로. 그 모습을 보고 웃는 어머니 곁에서 오래된 냄비. 어머니의 세월을 말없이 데려와 이제는 우리 가족의 지난 시간을 끓여내고 있다.
<정명희 약력>
▲한국수필 신인상, 서정문학 시부문 신인상
▲동서문학상 동시 당선
▲광주전남아동문학인회 올해의 작품상, 광주전남아동문학상 수상
▲수필집 : ‘삼월에 추는 눈의 왈츠’
▲동시집 : ‘병아리 한 마리 키우고 싶다’ 외 다수
▲그림책 : ‘나무가 준 선물’ 외 다수
언제부터 저 자리에 있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세월에 닳아 때깔도 없고, 손잡이도 헐거워졌다. 바닥에는 오래 불에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다. 한때는 반짝반짝 빛났을 냄비가 이제는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두 손을 놓고 한가롭게 쉬고 있다.
저 냄비를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의 많은 추억들이 떠오른다. 이 냄비는 지지고 볶고 끓이고 데우며 식구들의 밥상의 중심을 차지했다. 식구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어머니는 냄비부터 불 위에 올렸다. 아침이면 밥 냄새가 났고, 저녁이면 국 끓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맛있는 것을 해 먹는 날이면 냄비 뚜껑이 먼저 들썩였다. 그 모든 소리 뒤에 어머니와 냄비는 우리 집 부엌 한가운데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 무엇을 먹었는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냄비 바닥에 밴 흔적만큼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어느 날 대전에 사는 막내가 새 냄비를 사 가지고 왔다.
“엄마, 이거 새로 쓰세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냄비였다.
그런데 막내는 헌 냄비를 보자기에 싸기 시작했다.
“그건 뭐 하려고?”
“내가 가지고 갈게.”
“어디다 쓰려고?”
“캠핑할 때 쓰려고.”
나는 헌 냄비를 한 번 쳐다보고 막내를 쳐다봤다.
“요즘 누가 그런 걸 캠핑에 쓰겠냐?”
“걱정 마소.”
막내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날 저녁 막내에게서 사진 한 장이 카톡으로 왔다. 나는 사진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삼부자가 나란히 서서 냄비를 쓰고 있었다. 헌 냄비가 모자가 되어 있었다. 헐거워진 냄비가 머리 위에 얌전히 올라가 웃음을 퍼내다니, 이게 캠핑용 냄비라더니, 허 참. 나는 어머니에게 사진을 보여드렸다. 어머니도 한참을 들여다보시더니 웃으셨다.
“왜 가지고 갔는가 했더니 잘 어울린다.”
“엄마, 이런 모자가 세상 어디에 있어.”
“그려 냄비가 울 손자들 머리에 올라가 부렀으니 출세했다.”
“오메, 맞네, 우리 엄마 부녀회장 하듯이, 저 냄비가 출셋길이 환해 부렀구만.”
부엌에 있을 때 낡고 볼품없어 보이던 냄비다. 그런데 아이들 머리 위에 올라가 있으니 전혀 다른 물건처럼 보였다. 나는 그제야 냄비가 우리 집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생각했다. 어머니가 부녀회장을 맡아 하시면서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식생활 개선 교육 있는 날은 집을 교육 장소로 내어주기도 했다. 교육이 끝난 뒤 어머니는 우리 먹을 간식을 챙기셨다. 그때도 냄비는 어머니 곁에서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어머니가 새 냄비를 보며 말했다.
“예전 것이 좋구만 뭐하려고 바꿨는가 모르겠다.”
“엄마! 세련되고 좋구만.”
“아이구 세련이 두 번만 쳤다가는 우리 집 냄비 다 바꾸겠다.”
어머니의 말씀에 또 웃었다.
새 냄비는 반짝이고 깨끗했지만, 어머니 손에는 아직 헌 냄비가 남아 있었다. 어쩌면 새 냄비에는 없는 것이 헌 냄비에 너무 많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막내는 집에 왔다 가면 그냥 가지 않는다. 문짝이 삐걱거리면 손보고, 망가진 것이 있으면 고쳐놓고 간다.
“엄마는 좋겠어.”
어머니는 전화로 그것을 하나하나 자랑하듯 이야기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꼭 한마디를 덧붙인다. 좋아서 하는 자식의 일을 굳이 말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마음 놓고 좋아하지도 못하는 목소리다.
“애쓴다.”
나는 어머니의 부엌을 자주 다니며 정갈하게 치운다. 어머니가 평생 우리에게 해준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어머니에게 물어봐도 아마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그 시절을 지나온 냄비만큼 손바닥은 닳고 세월의 주름이 남았다. 어머니 삶이란 손때 묻은 가족의 체취를 맡으며 행복을 채워내셨다. 어쩌면 냄비의 쓸모는 끝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손에서 손자의 머리로, 부엌에서 캠핑장으로. 그 모습을 보고 웃는 어머니 곁에서 오래된 냄비. 어머니의 세월을 말없이 데려와 이제는 우리 가족의 지난 시간을 끓여내고 있다.
<정명희 약력>
▲한국수필 신인상, 서정문학 시부문 신인상
▲동서문학상 동시 당선
▲광주전남아동문학인회 올해의 작품상, 광주전남아동문학상 수상
▲수필집 : ‘삼월에 추는 눈의 왈츠’
▲동시집 : ‘병아리 한 마리 키우고 싶다’ 외 다수
▲그림책 : ‘나무가 준 선물’ 외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