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과 장흥 사이에는 ‘진흥로(津興路)’라는 길이 있다.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 종합운동장 앞 교차로에서 장흥군 장흥읍 영전리 순지삼거리를 잇는 총연장 11.2km 도로를 이렇게 부르고 있다. 2009년 7월 ‘2개 이상 시·군에 걸쳐 있는’ 국도 제23호선 광역도로로서 ‘진흥로’가 고시됐다.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의 이 구간의 길 이름을 강진과 장흥을 오가는 도로라며 강진의 ‘진(津)’과 장흥의 ‘흥(興)’을 한 자씩 꺼내 지은 기막힌 작명이라 생각된다.

이 기막힌 이름을 가진 진흥로에 또 다른 기막힌 사연이 하나 있다. ‘진흥로 891’이라는 주소지에는 정자(亭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곳 전남 장흥군 장흥읍 진흥로 891(송암리)는 설암(雪岩) 김필(金 : 1426-1470)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김필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등의 상황을 겪게 되자 세상을 한탄하며, 젊은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장흥 부산면으로 내려와 지냈다. 수양대군이 세조 임금으로 즉위한 후 관직생활을 하던 중 김필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되자, 후손들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사인(舍人)’이란 벼슬 이름을 따 ‘사인정(舍人亭)’이라 불렀다. 사인정은 1974년 12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사인정은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공포는 초익공의 홑처마 집으로 단층 목조 팔작지붕 형태”라고 분석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로 온돌방을 가운데 두고 사방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판자 마루를 돌렸다. 처마의 곡선은 중앙에서 밋밋하게 이어지다가 귀로 빠지면서 퍼덕이는 새의 날개인 듯 경쾌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정자 내부에는 ‘사인정 상량문’을 포함 20여 개의 편액도 걸려있다.

사인정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김필의 영정이 있는 참판공영정각(參判公影幀閣), 설암각(雪巖閣) 등이 함께 보존되고 있어 건축의 모양과 주변 풍경, 여기에 혼돈의 시대를 살다간 한 인간의 고뇌를 담은 스토리까지 더해진다면 멋진 관광자원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라 여겨진다.

사인정은 강진 군동면에서 장흥읍 방향으로 가는 국도의 강진과 장흥 경계지점 산등성이 탐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영광김씨 김필의 후손들은 이 경계지점(‘진흥로 891’)에 대해 할 말이 있다. 후손들은 “사인정은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고 관광자원으로서도 충분히 명소화 가능성이 높은데도 강진과 장흥의 경계선에 위치하다 보니 행정구역상 소재지인 장흥이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강진으로부터도 관심과 지원에서 멀어져 있는 형편”이라면서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 같은 사정 속에 영광김씨 후손들은 사인정 이야기를 담은 팜플렛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배포하는 등 자구책을 궁리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또 사인정을 문화재로 지정한 전라남도의 적극적인 문화재 보수, 유지, 지원과 함께 관광자원으로서 명소화 추진 등을 호소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무엇을 즐기느냐에 관심이 있다. 관광의 대상물이 행정구역의 경계에 있다고 관광을 주저하지 않는다. 서부 해당화와 철쭉 등으로 봄꽃축제의 명소가 돼 있는 강진 남미륵사를 찾는 구름 떼 관광객들이 바로 옆 장흥 사인정을 찾는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사인정 이야기는 행정의 경계를 넘는 광역 연계 관광의 지혜를 고민해봐야 하는 사례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