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팠어, 나왔어’

거대 담론 대신 자연과 일상, 개인의 미시적 경험을 통해 시대를 읽어온 방정아 작가가 해방기의 격랑 속 창작의 길을 모색했던 오지호의 흔적을 담아냈다.

2024 오지호미술상에 선정된 방정아 작가 전시 ‘묻다, 묻다’가 내년 1월18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예술가가 시대 앞에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을 다시 꺼내놓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작가의 신작 프로젝트인 ‘묻다, 묻다’로 응축됐다.

전시는 방정아가 2024년 오지호미술상 본상 수상 후, 상의 정신을 어떻게 자신의 작업 속에서 재해석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다.

그는 “오지호미술상이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체감하고 싶었다”고 말하며 오지호 화백이 해방기 이념 대립 속에서 누볐던 광양 백운산을 직접 답사했다.

지난 7월, 작가는 오지호가 머물렀던 백운사를 찾았다. 그곳에서 마주한 흔적과 풍경은 작가에게 근현대사의 균열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동시에 예술가로서 ‘시대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다시 던지는 출발점이 됐다.

회화 2점과 영상 1점으로 구성된 신작 ‘묻다, 묻다’는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탄생한 리서치 기반 프로젝트다.

‘묻다’라는 단어는 역사를 질문하는 ‘To Ask’와 기억을 땅에 묻는 ‘To Bury’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작가는 해방기 혼란 속에서 오지호가 자신의 정체성과 시대의 짐을 어디에, 어떻게 묻어뒀을지 떠올리며 그 무게를 화면으로 옮겨왔다. 예술가가 짊어져야 할 사회적 책임과 실존의 문제를 향한 이번 전시의 질문도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전시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사회·여성·생태·일상’ 네 가지 축으로 나눠 총 43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사회’ 섹션에선 1990년대 초반 민중미술의 문제의식을 잇는 초기작부터 최근의 신작까지 선보인다. 사회 모순을 드러내 온 작가의 태도를 보여주는 섹션으로, 환경오염과 국제정치 갈등을 다룬 ‘팠어, 나왔어’(2021), 노동의 존엄을 응시한 ‘아침 버스를 기다리는 구로공단의 여성들’(1991) 등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여성’ 섹션에서는 자전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중년 여성의 삶을 입체적으로 풀어낸 회화를 소개한다. 튼 살, 숨겨진 차별, 돌봄 노동 등 보편적 여성의 서사를 현실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들이다.

‘생태’는 작가의 주요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다. 급속한 개발과 기후 위기로 훼손된 환경, 그리고 그 안에서 희생되는 생명에 대한 연민이 두드러진다. 주한미군의 생화학 실험 문제를 직시한 ‘미국, 그의 한결같은 태도’(2021), 핵발전의 위험성을 다룬 ‘핵헥 Nuclear Nuclear’(2016), 폐현수막과 버려진 천을 재활용한 걸개 작업 등은 생태 위기 앞에서 예술이 실천할 수 있는 역할을 제안한다.

마지막 ‘일상’ 섹션은 방정아 회화의 정수가 담긴 공간이다. ‘잠시 디오니소스’(2023), ‘좀 흔들리면 어때’(2023) 등의 작품은 위트와 냉소, 때로는 조용한 위로로 이어지는 나직한 대화를 건넨다.

작가는 “오지호 선생이 해방기 혼란 속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 결국 지금의 나에게도 되돌아왔다”며 “예술가가 무엇으로 시대를 기록하고, 또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서 어떤 자리에서 서야 하는지를 이번 작업을 통해 다시 묻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2025 광주시 문화예술상 오지호미술상 본상에는 한희원 작가가, 특별상에는 박성완 작가가 선정됐다.

/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