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책만 읽다
“오막집 한 시렁에 가득한 책만 읽다가, 백년도 한 인생 반이 흘렀네. 마음 위에 품은 뜻은 현성(賢聖)의 일 뿐, 세상 사람 귀현(貴顯)함을 바라봄이 없소이다.”

평생 책만 읽었던 선비, 오직 성인처럼 수양이 깊어 높은 도에 이르기만을 바랄 뿐, 지위 따위는 아예 관심 밖이었던 분이 있다. 이 시의 주인공, 곤재 정개청이 그다.

정개청 사당 ‘윤암사’

곤재 정개청 유허비

오직 성인처럼 수양이 깊어 도에 이르기만을 바라고 책만 읽은 선비였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조선 정치사에 가장 가혹했던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돼 유배당하고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사후에 명예가 회복되어 그를 기리는 ‘자산서원’(紫山書院)이 건립되지만, 서인을 계승한 노론과 남인 간의 격렬한 갈등에 휘말려 다섯 번 훼철되는 수모마저 당한다.

자산서원 전경(전남 함평군 엄다면)

오늘, 그를 기리는 자산서원은 6번째 세워진 서원으로, 그가 역사적 승리자임을 보여준다.

정개청(鄭介淸, 1529-1590)은 1529년(중종 24) 나주 금성산 아래 대곡동에서 훈도를 지낸 정세웅과 금성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困齋)이고 본관은 고성이다.

부친의 관직이 지방 향교에서 유생을 교육하는 훈도였음은,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갖춘 유학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이는 전라감사(관찰사) 박민현이 1574년(선조 7) 정개청을 천거하면서 “무안에 사는 유학 정개청은 사람됨이 치밀하고 분명하며 … 가세가 지극히 청빈하지만”이라는 말 속에서도 알 수 있다. 살림살이가 지극히 ‘청빈’(淸貧)했다는 것은, 너무도 ‘가난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정개청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것은 없지만, 학문에 정진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유년 시절 보성의 영주산사(瀛州山寺)에 들어가 10여 년간 성리학을 비롯,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 점복술) 등의 잡학을 탐구했다.

산에서 나와 서경덕, 박순에게서 배웠으며, 41세에 전남 무안의 엄담(함평군 엄다면)으로 이주, 윤암에 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문하생들은 나덕준 형제 등 400여 명이 됐다고 하니, 정개청의 학문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짐작된다. 당시 정개청은 예학과 성리학에서 호남의 이름난 선비, 즉 명유(名儒)였다.

정개청은 과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호남의 명유로 이름이 나자, 전라감사 박민현과 영의정 박순은 정개청을 유일(遺逸)로 천거하지만, 관직 진출 권유를 극구 사양했다.

정개청의 첫 관직은 46세 때 북부 참봉이었다. 이어 55세에 나주 훈도, 58세에 궁중의 각종 제사 때 쓸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전생서(典牲署)의 주부, 그리고 60세 되던 해인 1587년(선조 20), 이조판서 이산해 등의 천거로 나아간 곡성 현감이 전부였다.

이조판서 이산해 등이 6품에 천거할 인물로 정개청과 신응구 등을 추천하자, 선조는 “(정)개청과 (신)응구는 내가 사실 애모(愛慕)하는 이로 함께 강론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긴다”며 곡성 현감으로 특별히 서용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고 맞닥뜨린 역사의 큰 시련은 그를 죽음으로 이끈 ‘기축옥사’라고도 불리는 ‘정여립 모반사건’이었다.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돼 죽다
1589년(선조 22), 황해감사 한준이 올린 비밀 장계 한 장이 조정에 당도한다. 정여립의 역모를 고변(고발)하는 문서였다. 그날 밤 조정은 비상이 걸린다. 3정승과 6승지, 의금부 당상이 참여한 중신회의가 급히 소집되었고, 금부도사가 정여립의 은거지인 전라도 진안군 죽도에 급파된다.

정여립 모반사건의 시작이었다. 정여립의 시신은 능지처참 된 후 조선팔도로 흩어졌다.

선조가 모반의 연루자들을 일러바치면 후한 포상을 내리겠다는 분부를 내리자, 조그마한 빌미라도 있으면 있는 말, 없는 말까지 보태 고해바쳤다.

이로 인해 죽임을 당한 사람, 유배된 사람, 벼슬이 떨어진 사람은 천여 명이 넘었다. 전라도 선비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정개청도 그중 한 분이다.

정개청이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된 것은 1589년 12월, 전라도 유생 정암수 등이 상소를 올려 “정개청과 정여립이 교우하면서 서로 사설(邪說)에 호응하였고, 절의를 배제하는 글을 지어 뭇사람을 의혹케 했다”는 것이었다.

정개청이 지어 사람을 의혹시켰다는 글이 ‘동한진송소상부동설’(東漢晉宋所尙不同說)이다.

‘동한진송소상부동설’의 뜻은 동한시대에는 ‘절의’를 높였고, 진송시대는 ‘청담’을 높였다는 것으로, 시대마다 가치관이 달랐다는 의미였다.

서인이었던 정철은 정개청이 본디 서인이었던 박순의 문인이었는데, 박순이 영의정에서 파직되자 동인인 이발·정여립과 교분을 맺으면서 스승을 배반한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 공격하면서, 정개청의 글을 임금에 대한 반역으로 연결하였다.

이듬해인 2월, “정개청이 (정)여립의 집에 가서 그 집터를 봐주었다”는 고변이 추가되고, 정여립에게 보낸 서찰 2통이 발견되면서 의금부에 갇히게 됐고, 함경도 경원에 유배된다.

그리고 심문을 받을 때 맞은 매의 장독으로 한 달 만에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지산서원, 다섯 번 훼철되다
정개청은 사후에도 엄청난 수난을 겪는다. 그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자산서원이 당쟁의 표적이 돼 다섯 번 훼철되고 다시 지어지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남인이 집권하면 복설됐다가 서인과 서인을 이은 노론이 집권하면 훼철됐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조선 당쟁사는 자산서원의 훼철과 복설 과정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정개청의 명예회복이 이뤄진 것은 1616년(광해군 8)으로, 그가 죽임을 당한 지 26년 만이었다. 그리고 그가 후학을 가르쳤던 윤암정사에 그의 신주를 모신 사우가 건립된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다시 기축옥사를 주도한 서인이 권력을 잡으면서 상황은 돌변한다. 정개청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고, 결국 1657년(효종 8) 사우가 훼철된다. 1차 훼철이었다. 정개청을 모신 사우 훼철에 앞장선 인물은 당시 서인의 거두 송준길이었다. 사우가 훼철되자, 재목은 헐려 무안현청 마구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서원이 다시 지어진 것은 1677년(숙종 3)이었다. 서원이 다시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숙종 즉위 후 예송논쟁 당시 남인이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예송은 조선 후기 현종·숙종 대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 기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 간의 논쟁을 말한다.

1659년, 효종 사망 후에는 조대비의 복상 기간을 3년이 아닌 1년으로 해야 한다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지만, 1674년 효종비 사망 후에는 9개월이 아닌 1년으로 해야 한다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

숙종은 예송을 잘못 이끈 죄를 물어 서인의 거두였던 송시열을 유배 보냈고, 송시열을 옹호하던 서인들을 모두 내쫓는다. 그리고 그 자리는 남인들의 차지가 된다. 정개청의 서원이 1677년(숙종 3), 다시 건립되게 된 연유다.

정개청 사당 복설에 앞장선 분은 남인의 거두로 2차 예송을 승리로 이끈 허목이었다. 허목은 “정개청은 학문이 순수하고 정대(正大)하여 사림들의 본보기가 되었었는데, 일찍이 정철의 정상과 태도를 말했다가 정철에게 거슬림을 받아, 형벌을 받고 멀리 귀양 가 죽었습니다. 그 뒤에 호남의 다사(多士)들이 원통함을 호소하여 관작을 복구하게 되고 사당도 세웠었는데, 송준길이 ‘정철은 조술(祖述)한 사람이라’고 임금을 속여 사당을 철거해 버리므로 사람들이 분개하고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또 상소를 진달하여 다시 세우게 해주도록 청했으니, 마땅히 윤허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자, 숙종은 다시 세우라고 윤허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678년, 전라도 유생들이 사액을 청하자, 숙종은 ‘자산서원’(紫山書院)이라 지어 내린다.

그러나 서원은 채 2년을 버티지 못했다.

1680년(숙종 6), 허적의 서자가 복창군 등과 도모하였다는 역모에 남인이 연루됐다며, 허적·윤휴 등 남인들을 대거 죽이고 유배 보낸다.

다시 서인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를 ‘경신환국’이라고 부른다. 같은 해 12월, 자산서원은 두 번째로 훼철된다.

1689년(숙종 15),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반대했던 서인이 몰락하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남인이 권력을 장악한다. 이를 ‘기사환국’이고 한다. 자산서원은 다시 복원됐는데, 3차 건립이었다.

세 번째 건립된 자산서원은 5년 만인 1694년 (숙종 20) 또 훼철된다.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왕후가 되었던 세자의 생모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키는 조치와 함께, 서인을 이은 노론이 다시 집권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훼철된 자산서원은 한동안 복설되지 못했다. 훼철된 자산서원은 1752년(영조 28) 다시 건립되었는데, 이때 이름은 제동사(濟洞祠)였다. 그러나 1762년 다시 훼철됐고, 1789년(정조 13년) 다시 세운다. 이마저도 온전하지 못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또 헐렸기 때문이다. 다섯 번 채 훼철이었다.

1942년 유림과 후손에 의하여 유허단향비(遺墟壇享碑)가 세워졌다가, 1988년 서원이 다시 건립된다. 현재의 자산서원이다.

정개청 시비 (자산서원 입구)

정개청의 저서로는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우득록은 1692년(숙종 18), 숙종의 특명으로 발간되었는데, ‘우’(愚)는 ‘어리석다’, ‘우둔하다’의 뜻이다. 자신의 우둔한 재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곤궁을 겪으면서 진리를 알아 얻어낸 것을 기록한 서적이라 해서 붙인 이름인데, 지극한 겸손이다.

‘우득록’의 서문은 남인의 영수로 2차 예송논쟁을 승리로 이끈 미수 허목이 쓴다.

서문에는 “숙종 6년 자산서원을 허물 때 남쪽 선비 중 곤재(정개청)를 추종했다고 옥에 가둔 자가 50여 명이요, 귀양보낸 자가 20여 명이며, 금고(禁錮)된 자가 400여 명이었다”라고 쓰여 있다.

정개청이 죽고 90년이 지났지만, 전라도에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자산서원의 건립과 훼철이 중앙 권력다툼의 결과물이었지만, 건립은 정개청을 따랐던 전라도 유생들의 피바람을 무릅쓴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