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의 감각으로 포착해낸 익숙한 장면이 관객들의 기억과 결합되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평범한 일상의 단면 속 발췌한 풍경을 무대로 자신과 관객의 이야기를 덧입혀가고 있는 서영기 작가 기획 초대전이 오는 20일까지 예술공간 집에서 열린다.

전시가 진행 중인 지난 5일 만난 서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의도적인 메시지보다는 다양한 상상력을 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이번 전시는 ‘발췌된 풍경, 덧입혀지는 이야기’를 주제로 꾸며졌다. 지난해 작가가 다녀온 광주시립미술관 독일 뮌헨 레지던시 활동 보고전이면서도 작가로서의 터닝 포인트가 담긴 최근 작업을 선보이는 자리다. 지난해와 올해 제작한 회화 30여 점과 드로잉을 소개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여섯 개의 대형 회화에 자연스레 눈길이 쏠린다. 세로로 길쭉한 회화는 스마트폰으로 찍은 풍경을 연상시킨다. 주름진 이부자리, 해질녘 숲속 풍경, 어두운 밤 창밖에서 어렴풋이 비추는 불빛, 분간이 어려울 정도의 깜깜한 밤 호숫가. 성인 키를 웃도는 높이의 그림 앞에 서면, 마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그 풍경에 오롯이 몰입하게 된다.

작가의 그림들은 독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정한 풍경이 아닌 일상의 작은 순간 순간을 모아 완성한 하나의 화면이다.

오롯이 감각만으로 포착해낸 작가의 일상 속 풍경이 화폭에 담기고, 그림은 저마다의 스토리를 지닌 관람객들의 수많은 기억과 겹치며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진다.

뿌연 물안개를 머금은 것 같은 ‘잃어버린 방향’은 아크릴 물감으로 가볍게 밑칠을 하고 종이 위에 유화를 올려내 완성한 작품이다. 물감을 잔뜩 머금은 종이는 부드럽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은은한 감각을 전한다.

밤의 고요한 풍경에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스미고, 평범한 일상의 모습에선 작은 울림이 느껴진다.

낯선 감각을 일깨우고 스스로를 발견하는 시간이다. 작가로부터 발췌된 다양한 풍경이 관람객을 마주한다.

그의 회화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1인칭 시점에서 바라본 아주 깜깜한 밤 어느 길목이나 사물, 고양이 정도가 그림 속 등장하는 소재의 전부다.

붉은 화염의 기세를 담아낸 듯한 작품 ‘시간의 표정’은 주황빛 독일 폐기물 차의 표면을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본 모습이다. 전체를 보여주기보다는 극히 제한적인 일부를 확대해 표현함으로써 추상적인 느낌을 강조했다. 오랜 시간 긁히고 녹슨 흔적들에선 흘러가는 시간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만큼 높은 곳에 있는 창문 너머 풍경은 ‘창에 그린 마음’이 됐다. 평소에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주위 풍경이 작가의 마음속 깊숙이 들어찼다. 해가 저물어가는 광경은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여름 하늘의 표정을 드러낸다.

‘창에 그린 마음’

비밀의 숲으로 향하는 길을 연상시키는 작품 ‘숨바꼭질’은 전시 전체를 아우르는 듯하다. 덤불로 둘러싸인 주택, 그리고 바로 앞 두 개의 선명한 붉은 줄은 대상과의 거리감을 보여준다. 한 발자국 떨어져 하나의 대상을 살펴보는 행위는 진실을 찾아가는 작가의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숨바꼭질(Hide and Seek)’

작가의 펜 드로잉 작업도 눈여겨 볼만하다. 만화와 일러스트를 자주 그리곤 했던 작가의 습성이 밴 작품들이다. 흰 바탕에 검은색 선만으로 구성된 그의 페이퍼 드로잉은 소박하면서도 정교한 비주얼이 매력적이다.

오는 11월 서울에서의 개인전을 앞둔 작가는 ‘밤 풍경’을 소재로 본격적인 작업을 펼쳐내겠다고 했다.

“조금 더 밤에 가까운, 어둠 속 자세히 들여다 봐야만 느껴지는 이미지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색의 대비나 분위기적인 측면에서의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저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에 관람객의 이야기가 덧붙여지는 그런 그림을 앞으로도 계속 보여드리고 싶어요.”

/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