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서에 실린 남도 최초의 인물 -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최초의 남도인은 왕인(王仁) 박사다.

왕인은 5세기 초(405, 일본 응신천황 16년, 백제 전지왕 1년) 일본에 건너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수하여 아스카 지역에서 꽃핀 일본 고대문화의 기틀을 닦았던 인물로, 일본에서는 아스카 문화의 비조(鼻祖, 시조)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왕인 박사를 언급할 때 최대 핸디캡은 왕인에 대한 기록이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남아 있지 않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남아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왕인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나 ‘일본서기’ 등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고사기’ 응신천황 조에는 “백제의 조고왕이 아지기시(阿知吉師) 편에 암수 말 한필씩을 공납하고, 큰 칼과 큰 거울을 바쳤다. 또 백제국에 ‘만일 현명한 사람이 있으면 공상하라’고 하였다. 이 명을 받아 건너 온 사람의 이름은 와니기시(和邇吉師)인데 ‘논어’ 10권, ‘천자문’ 1권 등 11권을 이 사람에게 보내 바쳤다. …… 또한 탁소라는 한단공(韓鍛工)과 서소라는 오복사(吳服師), 술을 만드는 인번 등이 건너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 뿐만 아니라 쇠를 다루는 기술자, 옷을 만드는 기술자, 술을 빚는 기술자 등과 함께 도일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응신천황 15년 8월 정묘(丁卯)일, 백제 왕은 아지기시(阿直岐)를 보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이때 천황이 아지기시에게 ‘너희 나라에 뛰어난 박사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아지기시가 대답하기를, ‘와니(王仁)라는 자가 있는데 그자가 뛰어납니다’라고 했다. …… 16년 봄 2월에 왕인이 왔다. 곧 태자 우치노와카이라츠도(菟道稚郞子)는 그를 스승으로 삼아, 여러 전적들을 와니에게 익혔으며,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사기’에 나오는 아지기시는 ‘아직기’이고 ‘고사기’의 와니기시와 ‘일본서기’의 와니는 ‘왕인’을 가리킨다. 조고왕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백제 근초고왕으로 나오지만, 일본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조고왕으로 ‘일본서기’에는 초고왕으로 나온다.

왕인이 도일했다는 응신천황 15년은 서기 285년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일본서기’ 응신기(應神紀)의 기년은 2주갑(120년) 내려서 재조정해야 실제 연대에 부합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원칙을 적용하면 왕인의 도일 시점은 405년이 된다.

왕인이란 이름이 보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헌은 1655년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 종사관 남용익이 쓴 ‘부상록’이다.

남용익은 ‘왜황의 차례를 설명(倭皇代序)’하는 ‘응신황’조에서 갑진년에 백제가 경전과 여러 박사를 보냈으며, 을사년에 백제가 왕자 ‘왕인’을 보냈다고 적고 있다.

왕인의 도일 시점을 응신황조 을사년으로, 왕인을 백제의 왕자로 쓰고 있음은 남용익이 일본에서 전해들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719년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수행한 신유한은 ‘해유록’에서 “왜국은 옛적에 문자가 없었는데 백제왕이 문사 왕인과 아직기 등을 보내 처음으로 문자를 가르쳤다”고 적고 있으며, 1763년 원중거는 ‘화국지’에서 일본에서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일본 사서를 참고하여 왕인을 소개하고 있다.

19세기에는 이덕무를 비롯한 실학자들이 왕인을 소개하고 있다.

이덕무는 그의 저서 ‘청령국지’에서 “왕인은 ‘난파진가(難波津歌)’를 지어 인덕천황의 왕위를 칭송하여 가부(歌父)로 일컬어졌으며, 또 관상에 능하였다”고 기록하여, 왕인이 상사(相師, 관상가)였음도 전하고 있다.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왕인이 제 경전에 능통하고 또한 인상(人相, 사람의 얼굴 생김새와 골격)을 잘 보았다”고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위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왕인은 5세기 초에 응신천황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 도일, ‘논어’와 ‘천자문’을 전수하여 일본 고대문화의 기틀을 닦는 한편, 동행한 봉제공과 야공 등 여러 기술자와 함께 일본 고대국가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유교 경전뿐만 아니라 관상에도 능통한 인물이었다.

-왕인의 생몰연대는?
왕인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민준식 박사는 ‘일본 아스카(飛鳥) 문화의 토대를 닦은 박사 왕인’이라는 논문 서두에서 “박사 왕인은 백제 제13대 근초고왕 28년(373) 무렵 월나군(月奈郡) 이림(爾林)의 성기동에서 왕순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의 성기동이다”라고 기술해 왕인이 태어난 해를 373년 무렵으로 보고 있다. 태어난 해를 373년이 아닌 373년 무렵이라 기술한 것은 믿을만한 자료를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민준식 박사의 주장처럼 373년 무렵이라 한다면,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연대가 405년이었으므로 당시 나이는 32세 무렵이 된다.

그렇다면 왕인의 몰년은 어느 때쯤일까? 왕인의 몰년과 관련해서는 미야가와 마사오(宮川昌雄)가 2012년 문예사(文藝社)에서 발간한 ‘일본 인물사’가 참고된다.

‘일본 인물사’에는 일본 역사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의 이름과 몰년만을 설명 없이 간단하게 적고 있는데, 첫 번째는 “응신천황 425년 몰(歿)”, 다음에는 왕인박사의 애제자라 할 수 있는 “토도치랑자(응신천황의 황태자) 435년 몰”이라 적고, 그 다음에 “왕인(백제 도래인) 437년 몰”이라 적고 있다.

미야가와 마사오가 쓴 ‘일본 인물사’의 기록을 신뢰할 수 있는지는 더 따져볼 필요가 있지만, 이 자료를 신뢰한다면 왕인은 370년대에 태어나 430년대 말엽 작고한 인물로 정리할 수 있다.

왕인박사 일본 도일도

- 왕인의 탄생지는?
오늘 왕인은 영암 구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왕인이 영암 출신임을 적은 최초의 책은 1930년대 충청남도 공주에 살던 유학자 이병연이 1937년 펴낸 ‘조선환여승람’이다. ‘조선환여승람’에는 영암군의 명소로 성기동을 소개하면서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백제 고이왕 때 박사 왕인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신라 진덕왕 때 국사 도선이 이곳에서 태어난 까닭에 성기동이라 말한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왕인의 출생지가 구체적으로 영암 구림이라는 기록도 있다. 1934년 영산포 본원사 승려인 아오키 게이쇼가 발표한 ‘왕인박사 동상 건립 계획안’이 있는데, 이 문건에는 “(왕인) 박사의 옛 땅이 영암군 구림이다”라고 적고 있다.

왕인 박사 영암출생설의 근거가 되는 지리지 ‘조선환여승람’과 ‘왕인박사 동상 건립 계획안’ 문건은 영암 지역에서 오래도록 전승되어 온 이야기를 문헌 형태로 수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호남지’나 ‘영암군지’ 등 여러 문헌을 통해 왕인 박사 영암출생설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왕인의 영암출생설에 대한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암 지역 이외에는 왕인 박사 출생지를 주장하는 곳이 없고, 영암 구림 마을에 전승되어 오고 있는 설화 등을 고려한다면, 구림의 성기동을 왕인 박사의 출생지로 보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백제 건국 이후 일본으로 이주하였던 마한 세력과 영산강 유역에 남아 있었던 마한 세력이 6세기 초까지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5세기 초에 일본으로 건너간 왕인 박사는 두 세력 사이의 교류 과정에서 일본이 필요로 하는 천자문과 논어를 비롯한 다양한 신문물을 전해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영암 구림에 전해오는 구비설화
왕인 박사의 탄생지로 알려진 영암 구림에는 왕인 박사가 태어났다는 성기동도, 수학하면서 물을 마셨다는 성천(聖泉)도, 왕인의 태를 묻은 산태(産胎)골이라는 지명도 남아 있다. 뿐만 아니다. 월출산 중턱에는 왕인이 공부했다는 책굴과 문산재·양사재도 있다. 그리고 책굴 앞에는 왕인박사 상으로 전해지는 석인상도 있다.

왕인이 일본에 건너가면서 동료 문하생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돌정고개이고, 배를 타고 도일의 길에 올랐다는 포구가 상대포다.

왕인이 일본으로 출발했던 포구, 상대포

왕인 박사와 관련되어 전승되는 구비설화는 영암 구림 마을이 왕인이 태어난 고장임을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구비설화와 ‘조선환여승람’ 등을 바탕으로 2011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에는 왕인유적지 및 사당이 조성된다.

왕인 박사 사당

왕인 박사의 흔적은 일본에도 많이 남아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이미 살핀 ‘일본서기’나 ‘고사기’에 나오고 있고, 그의 무덤도 일본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은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大阪府 枚方市)에 있다. 오사카부 사적 제13호로 지정된 무덤 앞에는 ‘박사 왕인지묘(博士王仁之墓)’라고 쓰인 비석이 서 있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 건립된 왕인박사의 비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일본의 심장부 도쿄 우에노 공원에는 “……공자는 춘추시대에 태어나 만고불후의 인륜 도덕을 밝혀서 천하 만세에 유림의 시조가 되었고, 박사 왕인은 공자가 돌아가신 후 760여 년 만에 한국에 태어나 일본국 태자에게 충·신·효·제의 도를 가르쳐 널리 나라 안에 전수해 1653년을 계승하여 왔다. 천고에 빛나는 왕인 박사의 위업이야말로 유구유대하며 끝이 없다”라는 글이 새겨진 ‘박사 왕인비’도 서 있다.

남도인으로 한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물은 405년 일본에 한자와 천자문 등을 전한 왕인이다. 그런데 교과서는 왕인을 백제인으로 쓰고 있다. 최근 나주 영산강 유역의 마한은 6세기 중엽까지 존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영암 구림 출신으로 405년에 도일했던 왕인은 백제인이 아닌 마한인으로 기술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