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구술자료집의 귀중한 가치
이경수
본사 전무이사·경영학 박사
2020. 01. 13(월) 19:39 가+가-
“결혼할 때 가진 것이라고는 없어서 쌀 한 가마니를 이곡(利穀)해서 갔어요. 그 쌀 한 가마니로 다음 해 농사철까지 살았습니다. 겁나게 힘들었어요. 어린 여동생들 셋까지 먹여 살리려니 얼마나 힘에 부쳤겠습니까? 밥상에 낼 것이 없어서 투박이에다 밥을 퍼서 같이 먹었습니다…….”

새해 초, 곡성군에서 꽤 의미 있는 기획성과물을 내놓았다. 곡성에서 살고 계신 80세 이상 노인들 가운데 각 읍면별로 2명씩을 선정, 그들의 인생이야기를 구술 채록해 책으로 발간했다. 3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자엔 80년 넘게 살아오신 지역 노인 22명의 삶이 그들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일본강점기와 6·25전쟁 등 목숨이 오갔던 험난한 세월을 견디고, 너나 할 것 없이 가난에 허덕이며, 자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새벽별 보면서 일어나 일했던 과거가 오롯이 살아 숨쉬고 있다.

곡성군은 이 작업을 3년째 이어왔다. 첫해엔 46명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구술채록 및 스토리텔링은 곡성지역 신문사에서 전문작가를 투입해 진행했다.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 마다 간직한 삶의 여정을 한 권의 책에 담기엔 턱없이 공간이 부족했다. 녹음기를 앞에 놓고 삶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인생이 구절양장(九折羊腸)처럼 펼쳐졌다. 다음해부터 인원 보다는 더 깊은 삶을 기록하고자 대상자를 22명으로 줄였다.

필자가 곡성군의 이같은 노인 구술프로젝트에 주목하는 까닭은, 단순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노인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민선 6기에 이어 재선에 성공한 유근기 군수는 ‘함께해요 희망곡성’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주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이는데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65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농촌지역 특성상 복지와 문화를 비롯한 각종 시책도 보다 다양하고 세부적이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고 있다. 그 고민의 산물의 하나가 ‘어르신 구술 프로젝트’로 나타났다.

이 프로젝트는 어르신들의 인생경험과 일상의 삶, 그리고 각기 다른 문화적 가치와 마을의 역사 등이 체계화되지 않았다는 현실을 확인하고 기획됐다. 방법은, 노인들과 친근한 전문작가가 80세 이상 어르신들을 찾아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태어나서부터 현재까지의 인생여정과 마을의 문화 및 역사를 하나하나 듣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한평생 마을을 지켜온 고령 노인들의 역할과, 생활 터전 곳곳에 배어있는 다양한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노년에 대한 자긍심을 되살리는 새로운 복지시책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구술 자료집은 후손들에게 귀중한 지혜를 전수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100년 우리나라의 역사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격동의 세월’이었다. 일본의 강점과 광복, 전쟁, 독재와 민주화, 가난과 경제성장, 갈등과 통합이라는 무수한 과정이 그 짧은 세월에 관통했다. 그 시간을 모아 놓은 것이 지금 구술로 풀어놓은 노인들의 삶이다. 그러하기에 어르신들이 살아 온 삶의 모습 하나하나는 개인의 역사를 넘어 시대가 고스란히 녹아든 공통의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수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노인 한 사람의 삶은 하나의 박물관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고 한다. 그 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보물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처럼 귀중한 노인들의 삶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흔이 넘어가면 채록에도 어려움이 많다. 기억은 흐려지게 마련이다. 실제로 이번에 구술하신 노인 한 분은 책이 세상에 나오기 며칠 전 소천하셨다. 불과 두 달전 구술채록자를 반갑게 맞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셨던 분이었다. 유가족들은 영전에 책자를 올렸다. 가족들은 그 분이 마지막으로 남긴 육성기록을, 눈물을 흘리며 읽으면서 가슴속에 품었다.

곡성군은 올해도 ‘곡성 어르신들의 인생이야기’ 구술채록집 발간사업을 계속한다고 한다. 지역 노인들의 칭찬도 이어지고 있다.

노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이를 기록해서 책으로 발간하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은 큰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는 곡성군민의 행복지수를 높이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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