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춥다. 찬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계절의 깊이를 고요히 일깨운다. 추위 탓인지 낯선 통증이 아릿하다. 종일 걸어도 멀쩡하던 다리가 아프다. 걸음이 느려지니 생각이 많아지고 계단 앞에 서면 시간이 잠시 멈춘다. 첫걸음을 내디딜 때면 “아-” 나도 모르게 나오는 소리. 무지근한 통증이 유달리 밀려오던 날, 병원으로 향했다. 염증 때문이라고 한다. 의사 선생님이 “두 달 동안 운동하면 안 됩니다”라고 주의를 준다. 매일 칠팔천 보 걸음을 걷는데 두 달 동안 걷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나이 먹으니 여러 가지 몸의 변화가 온다. 거울 앞에 서면 예전의 검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은 간곳없고 힘없는 은실을 만난다. 세월이 가져다준 시간의 색이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가는 것이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수용하기가 힘들다. 신기한 건 요즈음 검은 머리가 몇 개씩 돋기 시작한다. 회춘하여 검은 머리로 되돌아가는지 기대해 본다.

청력이 떨어진다. 누군가 두세 번씩 말해주어야 겨우 알아들을 때면 민망함보다 미안함이 앞선다. 가족의 말도 몇 번씩 반복해서 되물을 때가 있지만, 대충 짐작하여 듣는다. 필요할 때는 재차 확인하고 되묻기도 한다. 말을 적게 하며 듣기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면서 자연히 겸손을 배우게 된다.

안경을 쓴 건 50대 초반이다. 책을 오래 보면 눈이 피로하고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하여 안경을 쓰게 되었다. 눈 위에 살짝 얹힌 안경 하나로 세상이 또렷하게 보이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이젠 안경만으로 부족하여 돋보기를 찾아 더듬고 약 봉투의 작은 글씨가 보이지 않아 한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하지만 덜 보이니 따뜻한 말 한마디도 마음이 금세 더워진다. 사물을 확인하는 데도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삶의 속도가 느려지게 된다. 예전에 허투루 지나쳤던 풍경이 이제는 더 깊게 다가오고, 작은 풀 한 포기도 아름답게 보인다.

이태 전 겨울이 유난히 매서웠다. 거실에 앉아 물을 한 컵 마시려는 순간 겪어 보지 못했던 통증으로 가슴은 조여 오고, 식은땀이 나고 손끝이 떨렸다. 119에 전화를 걸었다. 이제는 내 몸이 나를 지켜 주지 못하는 걸까. 불현듯 서글픔이 몰려왔다. 병원에 도착하자 서둘러 심근경색 수술실로 이동되었다. 모니터의 심장 박동 소리는 생명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한동안은 숨을 쉴 때 심장이 다시 멈추지는 않을지 두려웠다. 심장의 스텐트는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리며, 더 조심스럽게 소중하게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렇게 몸의 각 부분이 말을 걸어오는 나이가 되었다. 눈이 침침하다고,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팔다리는 아프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모든 변화는 몸이 바쁘게 달려왔으니 천천히 관심을 두고 사랑해 달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런 불편들이 소소한 것들의 아름다움과 삶의 소중함을 몸으로 체험하게 한다.

요즈음은 남편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식탁에 마주 앉지만, 하루의 흐름은 다르다. 그는 아침마다 신문을 통독하고 복지관으로 출근하여 악기를 배우고 운동을 한다. 나는 걷기를 하고 돌아와 책을 펼친다. 밑줄을 긋고 활자 속에서 또 다른 인생을 만난다. 우리는 서로 방해하지 않으며 한 집에서 각자의 우주를 품고 살고 있다. 함께 있지만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는 관계, 지금의 시간은 어쩌면 우리 부부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사람들은 강산이 일곱 번 변한 이 나이를 인생의 겨울이라 말하지만 내겐 가장 따뜻하고 찬란한 봄날이다. 나 다운 삶, 배우고, 읽고, 쓰는 충만한 자유. 지금은 봄이다.

<윤재희 약력>
▲‘광주문학’ 등단
▲35년 초등학교 근무
▲수필집 : ‘시간의 경계에는 꽃이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