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떠나고 싶어진다. 새롭게 움트는 생명력 속에서 나도 함께 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일게다. 서울을 여행지로 삼았다. 언제나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다. 거리의 사람들, 자동차, 빌딩 사이로 바쁜 시간들, 젊은 시절에는 목적이 뚜렷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야 했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목적지가 있지만, 꼭 그곳에 도착해야 할 필요는 없다. 길을 잘못 들어 반대 방향으로 가더라도 괜찮다. 오히려 새로운 곳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퇴직 후 자유로 인해 그 여유가 가능해졌다.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여행, 그 자유로움을 마음껏 누린다.

여행이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여행엔 세가지 즐거움이 있다. 새로움에 대한 발견의 즐거움, 자유와 휴식에서 얻는 에너지 충전의 즐거움, 그리고 예상치 못한 우연 속에서 만남과 관계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다. 이번에도 그 공식은 어김없었다. 서울의 봄 풍경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겨울의 찬바람은 따스한 봄기운에 날려가고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활기찬 도시가 변함없이 나를 반겨줬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즐거웠던 것은 풍경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인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후배와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잊었던 즐거운 추억을 찾았다. 젊은 시절 비오는 날에는 단골 바에서 술 한잔 하는 것을 즐겼다. 찾아오는 벗들이 있어서 함께 하다 보니 벗들도 술 한병씩을 키핑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비오는 날에 모여서 키핑한 술을 즐기는 우주회(雨酒會)가 만들어졌다. 자격은 술 한병을 키핑한 사람, 탈퇴는 키핑한 술이 떨어진 사람이었다. 덕분에 젊은 날의 한 순간을 좋은 님들과 웃음짓는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산다는 것은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먼 훗날,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수 있으면 잘 사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름다운 추억은 우리를 웃음짓게 하고 춤추게 한다.

또 한사람, 인상 깊었던 만남은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지인이다. 10년 전, 서울에 올라와 단역 배우로 시작했던 그는 영화계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개척해 나가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사람의 꿈이 어떻게 현실이 되는지를 보았다. 그는 말 그대로 ‘물 만난 물고기’였다. 처음에는 낯선 환경에서 고군분투했지만, 이제는 자유롭게 헤엄치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는 공연을 하며 겪었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연습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열정이 있었기에 즐겁다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자체가 행복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서 순수한 열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 또한 내 삶을 돌아보게 됐다.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내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얼마나 몰입하고 있는가?

이번 서울 여행은 단순한 봄나들이가 아니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시선을 얻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여유로운 발걸음 속에서 예상치 못한 만남과 우연한 연결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줬다. 젊은 시절의 여행이 목적을 향해 달리는 길이었다면, 지금의 여행은 변화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과정이다. 계획하지 않은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 예상치 못한 순간들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봄이 주는 선물은 꽃이 피는 풍경만이 아니다. 여행 속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내 안의 새로운 모습이야말로 이번 여행이 남긴 가장 큰 선물이다. 여행은 끝났다. 그러나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여행을 꿈꾼다. 다음 여행은 국도로만 다니는 전국일주 여행이다. 봄처럼, 설레이는 마음으로 꿈꾼다. 꿈을 꿔야 또 이룰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