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시간이 어울려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공간, 오랜 세월이 켜켜이 쌓여 그 시간의 힘으로 다양한 삶의 흔적들이 저장된 공간, 바로 도시다. 지나온 시간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어떻게 남기느냐하는 것 또한 우리 시대를 사는 도시인들의 과제이자 숙명이다. 도시가 품고 있는 저마다의 개성과 다양성을 찾아 이승권 교수가 유럽의 도시를 눈으로, 발로 밟으며 담아냈다. ‘기억의 공간’이자 ‘기록의 공간’속에 숨겨진 소소한 일상은 점이 되고, 선으로 이어져 의도하지 않는 그림을 만들어 낸다. 스토링텔링된 그림에는 ‘문화’라는 색이 더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대를 넘어 세대를 관통하며 찬란히 빛나는 유럽 도시의 숨겨진 이야기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지향하는 광주의 새로운 방향성을 지향하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도시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 파리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여행하고 싶은 도시, 파리! 다시 가고 싶은 파리! 왜 그럴까? 내가 가고 싶을 때, 항상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도시, 그곳이 파리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파리는 1853년부터 1870년까지 진행된 나폴레옹 3세(Louis-Napoleon Bonaparte)와 센 지사(Prefect of Seine)인 오스만(Baron Haussmann)의 파리재생계획의 결과물이다.

19세기의 파리는 산업혁명으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고, 심각한 도시문제에 직면했다. 교통 체증과 무질서한 건축은 루브르 궁전과 같은 역사적 건축물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당시에 파리보다 근대 도시였던 런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나폴레옹 3세는 파리를 정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1853년 센 시장으로 오스만 남작을 임명했다.

오스만은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하고 기반 시설부터 도로, 행정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모든 기능을 고려한 근대식 파리를 설계했다. 광장을 중심으로 대로가 만들어졌고 도로를 따라서 오스만 양식의 건물이 들어섰다. 크고 작은 공원과 숲, 공공시설도 들어섰다. 상수도와 하수도를 정비해 도시의 위생을 혁명적으로 개선시켰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주인공 장발장(Jean Val Jean)이 도망치던 하수도! 그 유명한 파리의 하수도가 이때 건설됐다.

-파리재생계획 밑거름 ‘근대의 수도’ 탄생-

성심성당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필자.

오스만의 파리재생계획은 유효성을 인정받아 19세기의 도시 미학의 모델이 됐다. 도시공간의 변화는 근대 시민의 탄생을 불러왔다. 근대 이전의 절대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이 시민혁명, 산업혁명, 과학혁명을 통해서 상대적 시간과 공간 인식으로 변화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렇게 변화된 파리를 ‘근대의 수도’라고 불렀다.

오스만의 파리재생계획은 파리를 어떤 도시보다도 근대성을 갖춘 도시로 변모시켰고 아름답고 효율적인 도시로 재탄생시켰다. 파리는 19세기 유럽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그러나 오스만의 파리재생계획에 반기를 든 사람도 많았다.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주자인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오스만 남작의 도시계획을 극찬했지만, 우울한 산보자(Flaneur)로 알려진 보들레르는 파리의 옛 모습이 사라지는 것에 반대하며 비판했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오스만의 도시계획으로 백화점이 등장하기 이전에 형성된 아케이드를 대상으로 하는 도시문화 분석이다. 파리에 망명 중이던 벤야민은 파리의 아케이드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자본주의와 근대 시민의 관계를 날카롭게 분석했다.

오스만의 파리 재생계획으로 새롭게 탄생한 곳의 하나가 우리에게 예술가의 무대로 알려진 몽마르트르다. 당시의 몽마르트르는 파리가 아니었다. 몽마르트르는 파리의 북쪽으로 나가는 통로(Porte de paris) 주변의 마을로 약 130m의 언덕이었다. 몽마르트르는 포도밭과 석회석 채석장, 농가들, 풍차로 움직이는 압착기, 제분기 등이 널려 있는 파리 바깥의 마을이었다.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 자리한 테르트르 광장.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테르트르 광장에서 5분 정도 내려오면 ‘사랑의 벽’이 나온다. 이곳에는 250개국 언어로 311개의 ‘사랑해’라는 단어가 적혀있다.

1860년 오스만은 파리의 12개 행정구역을 20개 행정구역으로 확대하며 몽마르트르 지역을 파리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몽마르트르가 언덕이었고 외곽이었던 관계로 오스만식의 도시재생계획이 도심처럼 적용되지는 않았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바라 본 ‘샤크레쾨르 성당’(성심성당). 생 드니(Saint Denis) 성인의 순교지에 세워진 ‘샤크레쾨르 성당’(성심성당)은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을 본 떠 비잔틴 양식으로 1914년 완공됐다.

몽마르트르가 파리의 옛 모습을 간직한 ‘파리 속의 파리’로 남게 된 이유이다. 근대화로 몽마르트르 지역도 변했지만 옛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도시의 지속가능성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도시의 지속가능성은 도시의 역사나 장소에 대한 연속성이다. 파리에서 30년 전에 본 모습을 20년 전에도 볼 수 있고, 2023년 가더라도 동일한 파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미래를 끌어와 현재에 가둬 놓고 과거를 현재화하는 시간여행의 도시!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공간을 통해서 여행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시가 파리다.

파리의 일원이 된 몽마르트르에 남아 있는 포도밭에서는 오늘날도 포도를 수확하고 축제를 한다. 제분소였던 ‘물랭 드 라 갈레트’(Le Moulin de la Galette)는 술집으로, 무도장으로 변신하며 인상주의의 탄생에 일조했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공간이었던 세탁선(Bateau Lavoir)은 피카소의 아비뇽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을 탄생시켰지만, 오늘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채 그 자리에 있다. 세탁선 주변의 광장이 세탁을 하던 곳이었다는 사실은 장소성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19세기 말경 파리지앵들로부터 사랑받던 무도회장 ‘물랭 드 라 갈레트’

- 스토리텔링으로 재탄생한 ‘文化의 寶庫’ -
몽마르트르를 유명 관광지로 만든 데에는 다양한 사연을 간직한 장소의 스토리도 크게 기여했다. 물랭루즈(Moulin Rouge)의 이야기는 몽마르트르를 사랑의 스토리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검은 고양이(Le Chat Noir) 카바레의 이야기는 몽마르트르를 홍등가로 만들었고, 값싼 선술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예술가들을 불러 모았고 이 지역을 유흥가로 만들었다.

검은 고양이 카바레 전경과 광고 포스터.

영화 아멜리에(Amelie)에 등장하는 카페는 젊은이의 성지가 됐다. 대한민국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무대였던 장미의 집도 한국의 젊은이라면 잠시 쉬어가는 명소가 됐다. 오스만의 파리재생계획으로 도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정착한 이곳은 여전히 허드렛일을 하며 삶을 영위하던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자신들의 역사를 영광의 역사이건 비극의 역사이건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파리지엥의 태도에서 진정한 도시문화가 무엇인지? 문화다양성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문화도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이승권·조선대학교 대학원 문화학과 교수>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의 배경이 된 아멜리아 카페(사진 上)와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 나온 ‘장미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