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결정론과 정치 리더의 과제 / 이성대
2022. 06. 23(목) 19:14 가+가-

이성대 시사평론가

최근에 국제적인 저널리스트 팀 마샬(Tim Marshall)의 지리의 힘을 강조하는 책을 읽었다. 대체로 지정학적 요인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주제의 책이다. 내용을 보니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인기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는 뜻이다.

학창 시절에 인간의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다거나, 국가의 운명은 지정학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식의 주장을 들으면 거부감이 앞섰던 기억이 있다. 진취적으로 인생을 개척하거나 국가의 운명을 바꿔보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주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우여곡절을 어느 정도 경험해 본 나이가 되니 인간이나 국가의 운명이 반드시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특히 개인의 삶과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국가의 운명은 지정학적 요인과 이에 영향을 받는 정치적, 경제적 요인에 의해 크게 좌우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후천적 노력이 환경적 요인을 전혀 극복할 수 없다거나 국가의 운명이 전적으로 지정학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뜻은 아니다. 개인의 주체적 노력이나 국민들의 불굴의 의지 및 노력이 주어진 환경적 요인을 극복해 나가는 힘이 되는 경우도 많다. 다만 그런 노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라도 환경적 요인, 지정학적 요소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명저 ‘총, 균, 쇠’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개인과 국가만이 아니라 문명 차원에서도 지리적 요소가 결정적인 발전 요인이라는 분석을 제시해서 충격을 준 바 있다. 유럽 문명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것이나,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가 오랜 세월 정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에는 지리적 요소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문명 수준의 지리 결정론이다.

이런 지리 결정론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됐다. 개인이나 민족의 노력을 폄하하고 운명론적 냉소주의를 조장한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리 결정론에는 뜻밖의 진보적 측면도 있다. 과거와 현재의 유럽문명 우월론자들은 유럽문명이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세계를 지배하는 문명의 위치에 올라선 것은 유럽의 백인들이 인종적으로 다른 유색인종들에 비해 우월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리 결정론은 이런 인종주의적 편견에 펀치를 날렸다. 당신들이 우수한 문명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동서로 길게 뻗은 유라시아 대륙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연적 요소가 많이 작용한 것이지 당신들이 우월한 인종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정학적 지리 결정론이 반드시 보수적이고, 그 반대의 자유의지론이 반드시 진보적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지리 결정론이 오히려 선입견을 극복하고 상황에 대한 새로운 혜안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다.

이제 지정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우리 역사에서 호남지역은 국토의 서남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많은 평야지대를 끼고 농업과 수산업이 번성한 지역이다. 농경사회에서 이런 지리적 요인은 높은 생산성으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하지만 이러한 부로 인해 이 지역민들은 오히려 수탈과 억압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과거 한 나라를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라는 영예로운 타이틀과 함께 수탈과 억압이라는 비운의 역사는 호남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됐던 것이다.

근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상공업이 중시됨에 따라 호남의 지정학적 여건도 많이 변했다. 이제는 농경사회에서처럼 부를 창출하는 중심지역이 아니라는 지정학적 여건이 지역민들에게 또 다른 굴레가 되고 있다.

얼마 전 지역의 정치 리더를 선출하는 선거가 치러지고 이제 새로운 대표자들이 지역을 이끌어가게 됐다. 지역 차원에서 지리적, 지정학적 요인에 대한 명민한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지역의 미래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는 혜안과 전략을 갖춰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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