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 ‘인간의 보루’에 관한 얘기입니다만, 출판업에 매진, 경제적 역경에 시달리시다가 겨우 극복하고 주택산업계에 뛰어들어 근로정신대 문제를 접하게 되는 소시민적 생활인의 모습부터 김중곤 유족과의 교류, 그리고 나고야 지원회에 가입한 뒤 활동하시는 모습까지 체험에 근거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사건의 내용이 시간, 장소, 인물 소개와 함께 사실로 자세히 기록돼 있어서 번역하면서 작가께서 홀로여행을 좋아하므로 혼자서 특정한 일이나 어떤 사항에 대해 골똘히 사색하기도 하고 그것을 일기처럼 구체적으로 적어두신 점에 대해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제주도를 방문해 약속다방에서 김중곤 유족을 우연히 만난 것은 특별한 일이었죠? 그 만남은 극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잊혀지지 않는 한국인과의 만남이나 독자들에게 참고할 만한 얘기를 들려주시죠.

-야마카와: 매일 일기를 쓰지는 않지만 빠뜨림 없이 평소 메모를 해두죠. 기억 중에 고교 1학년 때의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영어 선생님이 경성(현 서울)중학교에서 가르치신 적이 있었죠. 일본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온 선생님이에요. 이 교사가 수업시간에 여담으로 경성시대의 일을 그리운 듯 얘기했습니다. “경성은 훌륭한 곳이었다. 이런 농촌의 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도시였다.” 이 교사의 말에 나의 조선에 대한 이미지는 바뀌었어요. 밝은 문화도시 서울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더욱이 일본에선 유명한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라는 작가가 있었죠. 이 작가의 부친이 일찍이 조선총독부의 직원이었어요. 나중에 가지야마는 ‘족보’라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창시개명이 테마였네요. 그 뒤 한운사(韓雲史)에 의해 드라마로 나오고 영화로 상영되기도 했어요. 나는 출판사 일을 하던 시절에 가지야마 도시유키와 몇 차례 만났습니다. 이러한 이상한 인연이 내 마음 속에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한국여행 중에 친해진 유재황(劉載晃)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한때 김중곤씨보다도 더 친밀한 사이였죠. 난 ‘파고다공원의 할아버지’라고 불렀어요. 난 이 인연을 최초의 내 개인 잡지에 ‘한국이라는 향수’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나중에 나고야의 고이데 유타카(小出裕)씨가 발간하는 ‘일본과 조선’에 연재했죠. 그리고 최종적으로 ‘한국낭만방황’에 수록했네요. 내 마음 속에 한국에 대한 향수가 잠재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정훈: 작가로서의 성찰을 일깨우는 말씀이군요. 가지야마 도시유키와 ‘악마의 포식’을 쓴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책에 언급하시지 않았나요? 재미있게 읽으며 옮겼던 기억이 납니다. 모리무라가 호텔 프론트에서 근무하면서 집필에 몰두하던 가지야마를 동경의 눈빛으로 지켜보며 꿈을 키웠고, 대성했다는 대목이죠. 헌데 나고야 지원회의 다카하시 대표가 ‘악마의 포식’의 합창단 활동도 하시더군요. 제가 게으름뱅이로 메모를 하지 않아서 정확히 몇 년 몇 월인지를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다카하시 대표의 소개로 일본의 ‘악마의 포식’(모리무라의 작품명이자 합창단 이름)의 합창단이 광주까지 오셔서 근로정신대 시민모임과 교류회를 가졌던 적이 있어요. 모리무라 세이치 작가가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의 제2차 ‘어필’ 호소인이라는 대목에선 놀랐습니다. 가지야마의 고백적 성찰에 대해 언급하시는 곳을 번역하면서 작가 하하키기 호세이의 ‘해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죠. 가지야마의 ‘족보’처럼 불행한 한일관계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쓰인 작품으로 읽었어요. 하하키기도 자신의 아버지가 헌병으로 중국 상황을 감시하다가 일본 패전 때 전범으로 붙잡혔다고 아사히신문에 고백해서 화제였죠. 작가의 고백적 성찰 인상 깊습니다.

-야마카와: 작가의 사명은 읽어주시는 독자들에게 어떠한 감동을 전하고 사색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동은 사색에 대한 자극이 된다고 확신하니까요. 어떠한 소재가 감동, 사색의 모멘트가 되는지 항상 염두에 두며 작품을 쓰고 있는 셈이죠. 감동을 제공하는 근원적 모색이 작가에게는 즐거운 단면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보루’의 집필 배경을 돌아보면 고교시절부터 문예창작이 좋아서 집중했고, 고교와 대학 재학 시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죠. 큰 상은 받지 못했다고는 하나 여러 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러한 연장선에서 풍부한 체험을 했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보루’의 집필을 결단한 것도 김중곤씨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해 나고야 지원회에 가입해 활동 중, 언젠가 이 문제에 대해 써야한다는 생각이 움텄기 때문이죠. 나고야 지원회에 책을 내는 분이 없기도 해서 사명감을 느끼게 된 겁니다. 글쓰기에 삶의 보람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고야 지원회의 활동에 참가해 행동만 했으리라 생각해요. 문필가로서 보람을 느끼며 사는 인간의 숙명이죠. 하지만 징용 문제는 너무나도 크고 깊은 소재이기에 한일관계의 역사, 문화, 민속에 관심도 깊어져서 가능한 한 독서에 매진한 셈입니다. 현재 자택의 책장에는 1천여권의 한일, 북일 관계 서적이 있습니다. 인생의 말기이므로 주택산업 관계서적이나 문학서, 그 외의 서적은 모두 처분했습니다.

▲김정훈: 네 알겠습니다. 7-8년 전에 처음 ‘인간의 보루’를 읽었습니다. 이후 군데군데 살피다가 한일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연구자 입장에서 번역하면서 이 책의 방향성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명관 교수를 비롯한 석학들의 한일관계에 대한 선견적 진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마카와: 지적처럼 ‘인간의 보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은 ‘한일교섭의 빛과 그림자’입니다. 지명관 교수는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지명관 교수의 생각에 공감하니까 인용했어요. 여담인데요, 일찍이 지 교수께서 일본에 강연하러 오셨을 때 저는 가장 앞자리에서 경청했습니다. 당시의 강연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인품에 감동했죠.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보이시는 강력한 사상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집필 시에도 지 교수의 책을 숙독했습니다. 그분의 저서가 일본에서 6권 출판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항목에서 소개한 미국의 존 다우어 교수나 일본의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교수도 공통으로 지적한 부분입니다.

나고야의 아츠다신궁 앞 행진(조선여자근로정신대,1944)

▲김정훈: 한일조약과 함께 체결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한일의 의견 차이로 문제에 대한 긍정적 접근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데, 지 교수께서는 이 조약에 대해서 ‘미완의 조약’이라고 하셨죠?

-야마카와: 네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시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하셨어요. 이 조약이 많은 휴유증을 남겼고, ‘비결정적 성격’을 염두에 두고 개정해야 할 곳은 개정해야 하고 해석도 새롭게 해야 하는 현실적 자세가 요구된다는 견해를 제시하셨죠. 더구나 남북이 통일될 때를 상정해서 기존의 한일조약이나 맺어질 북일조약에 대해 다시 수정을 고려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셨고요. 다카사키 교수나 존 다우어 교수의 견해도 동일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어떤 식자는 일본이 ‘역사 건망증’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나는 건망증은 커녕 일본의 정치가나 국민의 대다수는 한일의 역사인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논의가 확산돼야 합니다.

▲김정훈: 네. 국가 간의 협정, 조약이라도 불합리하고, 새로운 비극적 사실이 드러나거니와 소송이 이어지는 상황을 고려해 보완할 곳은 보완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읽히는군요. 책에도 일본책임 문제에 대해 언급하셨기에 논의을 진전시키면 항상 생각하는 문제입니다만,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식민지 시대가 없었다면 남북이 분단되는 일은 없었다고 보는 설이 많습니다. 일본의 침략주의가 조선 식민지지배와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일본의 패전과 함께 외세에 의해 조선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진 점을 생각해서요. 작가님도 책에서 일본의 한국전쟁 중의 경제특수와 책임에 대해 지적하셨죠. 그러니까 조선민족의 참해방의 정서는 민족통일과 함께 찾아올 겁니다. 일본은 통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권력과 미쓰비시중공업을 비롯한 전범기업의 사죄와 배상과 같은 현실적 문제가 타결되면 한국과의 선례를 참고로 북한과도 교류협정의 물꼬가 트일 수 있겠고요. 거시적 관점에선 통일이 되는 날 비로소 일본은 조선민족의 정서에 대해서도 과거청산의 의미를 갖게 된다고도 여겨지네요. 하지만 일본에는 정략적으로 남북분단을 이용하려는 정치가들도 있거니와 영구히 분단을 정착시키려는 우익세력도 있습니다. 큰 착각이며 문제해결과는 더욱 멀어지는 행위라고 봅니다만.

-야마카와: 일본의 식민지기의 실태에 대해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사죄의 뜻을 담아 조선통신사를 초청한 선례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죄함으로써 미래가 열린다고 생각해요. 북한과의 평화협정이 맺어지는 날이야말로 남북통일의 기점이 될 것입니다. 북일 관계의 해결이 남북통일의 길을 열어주기를 바랍니다. ‘모든 게 해결 완료’라고 고집할 뿐 전혀 듣지 않는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은 귀를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정치가도 일반 국민도 한일조약에 명시된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이라는 한 구절에 매달리며 한국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어요. 분명히 ‘해결 완료’라는 언어만을 의식한다면 이 문제는 끝났다고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일본의 법정도 나고야 지원회도 해결된 것은 외교보호권이지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은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죠. 하지만 모두가 오로지 ‘해결 완료’라는 언어만을 믿고 있습니다. ‘인간의 보루’는 이 장벽에 돌을 던지는 심정으로 쓴 에세이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한글판의 간행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문예창작에 삶의 보람을 느끼며 살아온 저입니다. 긴 요양생활 속에서 신체적으로 약한 인간에게는 글을 쓰며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독서삼매의 나날이었습니다. 작가의 신념은 변함이 없죠. 시간과 시대는 흐르지만 진실은 진실이고 거짓은 거짓입니다. 질릴 정도로 태생적으로 집념이 강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네요. 10대에는 폐결핵으로 3년 반의 요양생활, 60대의 심장수술, 그리고 작년 혈액암이라 불리는 악성 림프종도 극복했죠. 스스로를 집념이 강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