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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빈센트 반 고흐
그림밖 화가들

2018. 10.23. 19:34:15

‘가셰 박사의 초상’

명품 회화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음 세대에게 그 명성과 감동이 그대로 전해진다. 작가들은 작품에 저마다의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작가의 인생을 오롯이 담은 작품은 하나의 이미지로서 대중의 인식 속에 남는다. 그렇다면 작가들의 작품 너머 그들의 마음과 삶에 담긴 숨은 이야기들도 넘쳐날 터. 큐레이터이자 갤러리 운영자로 활동하며,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는 문희영(예술공간 집 관장)씨는 바로 이 숨은 이야기들에 집중했다. 몇 해 전 고흐에 관한 책을 출간한 뒤, 유명작가들의 작품 이면에 담긴 스토리에 중점을 둔 연구를 하고 있다. 미술사적, 미학적 해석보다도 자연스레 삶을 바탕으로 그려지게 된 그림들, 특이한 성격, 독특한 경력 등 흥미롭게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들에 집중한다. 반 고흐의 화상의 경력, 폴 고갱의 펀드매니저 경력, 원시 섬에서의 생활 등과 모네가 그린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 이후 새로운 사랑을 가져다 준 두 번째 아내를 그린 그림들, 괴팍한 성격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현대미술의 아버지 세잔 등 화가들의 드라마틱한 삶이 어떻게 작품과 연관되는지 흥미롭게 풀어낸다. /편집자 주

1990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한 작품이 8천250만 달러에 낙찰됐다. 당시 한화로 약 580억원. 입지도 먹지도 살지도, 타지도 못하는 한갓 그림이 무려 580억원이라니 감히 상상도 못할 액수다.

그림은 반 고흐가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으로 고흐가 마지막 생을 보낸 프랑스 파리 근교의 오베르에서 고흐의 병을 치료해줬던 가셰 박사를 그린 것이다.

고흐가 세상을 떠난 1890년에서 100년이 지난 1990년 일본 제지회사의 회장이었던 사이토 료헤이가 구매했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르느와르의 그림 한 점을 7천810만 달러에 사들였고, 당시 료헤이가 자신이 죽거든 그림을 관에 함께 넣고 화장해달라는 말을 했다는 소문이 퍼져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에게 호된 비방을 받기도 했다. 100년의 시간이 지나고 고흐는 사라졌지만 작품은 거세게 돈을 집어삼켜갔다.
‘붉은 포도밭’

고흐의 생애 마지막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마지막으로 살았던 오베르는 작은 시골마을로, 동생인 테오가 있는 파리와도 가까웠고 무엇보다 신경정신과 의사에 미술애호가였던 가셰박사에게 치료를 받으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흐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림 속 가셰박사의 표정을 짐작해볼 수 있듯 그도 약간의 정신병력이 있었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님이 또 다른 장님을 끌고 간다면 넘어지기밖에 더하겠냐’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오베르에 오기 전 고흐는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의 1년을 보냈고, 그 전에는 귀를 자르는 사건이 벌어졌던 ‘아를’에서 1년여를 보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흐의 명작들은 아를에서부터 탄생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채 3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고흐의 명작들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아를에서부터 고흐는 지독하리만치 외롭고 고독하고 궁핍한 처절한 홀로서기의 시간이었다. 귀를 자르는 사건 때문에 아를에서 추방당했고, 당시 감옥과도 같이 여겨졌던 정신병원을 스스로 선택해 들어갈 만큼 비참했지만, 고흐의 예술혼은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순간 더욱 활활 타올랐다.

그렇다면 고흐는 정말 오로지 예술만을 위한 삶을 갈망했을까?

여섯 남매의 장남이었던 고흐는 중학교를 마치고 삼촌이 운영하는 화랑에서 일을 했었다. 성실하고 꽤 잘나가던 직원이었지만 결국 그만두게 된다. 자신이 진정한 예술이라 믿는 그림과 돈을 가진 자들이 원하는 그림은 항상 달랐고, 입에 발린 말로 이들을 설득해가며 그림을 팔수는 없었다.
글쓴이 문희영 대표는… 조선대 미술대학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으며, 광주 동구 장동에 갤러리 겸 복합문화공간 예술공간 집 관장으로 활동 중이다.

고흐에게 예술과 돈의 경계에 대한 고민은 아마도 이 어린 10대부터가 아니었을까. 뫼비우스의 띠 같은 ‘예술과 돈’은 고흐의 평생을 따라다니던,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생애 마지막 순간, 고흐와 테오 두 형제는 네덜란드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테오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터. 하지만 테오도 6개월 후 세상을 떠나고, 진실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죽음의 신화’는 한 화가가 신화적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데 충분했다. 예술과 돈의 경계에서 매번 예술을 택했던 고흐의 사후, 돈은 예술의 가치를 또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나갔다. 비단 한 장의 그림이 아닌 너무도 치열했던 화가의 영혼으로, 안쓰럽기 짝이 없었던 삶을 애달프게도 증명한다.

헌데 만약 고흐가 부자였더라면, 또 아주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고, 살아생전 모네처럼 유명해졌다면 고흐의 그림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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