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지난 여름의 폭염과 산불, 홍수로 힘들었던 탓인지 다가오는 가을이 유난히 반갑다. 인간사의 흐름이 도전과 응전으로 이어지듯, 어디선가 누군가는 어려움을 딛고 다음 날의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갈 힘을 모으고 있을 것이다. 젊은 날의 사계절은 생존을 위한 분주함 속에 스쳐 갔다. 어느 날 눈을 뜨면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힘들었던 어느 한 해는 한 계절이 통째로 빠져 기억의 빈칸이 됐다.

퇴직하고 보내는 사계절은 다르다. 여유 속에서 변화의 촉감을 천천히 음미한다. 해마다 같은 계절이 반복되는 듯해도, 나이가 들수록 계절은 더 새롭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평범한 일상에서 같은 것들 속에서 새로움을 찾는 일이 곧 배움이 된다. 어느 날 문득 해먹에 누워 수없이 올려다보던 하늘의 구름이 달리 보였다. 여름의 구름은 솜처럼 부풀어 오른 적운으로, 생동감과 힘이 넘친다. 그 에너지가 폭우와 폭염을 만든가 보다. 반면 가을의 구름은 엷고 길며, 줄무늬나 물결 모양으로 하늘을 덮는다. 맑고 높으며, 고요하고 명상적인 느낌에 가을은 사색의 장이 된다.

계절의 변화가 꽃과 나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름도 계절에 따라 다른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가장 느린 구름의 속도가 고속버스의 속도와 비슷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자연의 흐름을 알게 모르게 따라가다 보면 숨은 뜻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꽃이 피고 지듯이 인간도 자연의 작은 일부로 자연스럽게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알고도 느끼지 못하고 영원할 듯 살아가고 있는게 우리네 삶인가 싶다. 그래서 가을은 낙엽을 보내어 지나온 날들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집이 산비탈에 있어 사방에서 내려오는 칡넝쿨을 아직까지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마당의 잡풀은 칡넝쿨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자르고 잘라도 끝없이 자라고 새롭게 뿌리 내리는 칡넝쿨은 금년에도 이겨내지 못했다. 밀려오는 넝쿨은 바다의 파도 같이 다가온다. 하지만 그렇게 끝없이 자라던 넝쿨도 가을의 서늘함에 힘을 잃고 서서히 색이 바래가고 있다. 자연의 흐름에 파도처럼 번지던 넝쿨도 땅 속으로 스며든다. 가을이 깊어지면 칡넝쿨의 뿌리를 더듬어 정리하고 새해에는 조금 더 여유로운 마당을 맞이하고 싶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도 정원으로 가다듬어 즐길 수 있다. 가꾸어가는 즐거움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겠다. 그것이 나의 응전이다.

어릴 적부터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배웠지만 지금은 다르게 말하고 싶다. 가을은 앉아 있기에는 아까운 계절이다.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느낌을 안고 낙엽이 흩날리는 길을 나서는 계절이다. 막연한 결심으로는 길을 나서기 어렵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떠나게 된다. 시골에 살면서 틈나는대로 낯선 곳을 찾아 나선다. 한 달에 한번은 가까운 곳으로, 두 달에 한번은 서울로 여행을 떠난다. 그런 계획이 있기에 일상생활이 설레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삶의 활력이 생긴다.

며칠 전 남해에서 며칠을 보냈다. 섬의 어깨를 타고 오르는 일출로 하루를 열었다. 동해의 일출은 장엄하고 경이롭다. 그러나 남해의 일출은 아기자기한 섬 위에서 한가롭게 떠 오른다. 동해의 일출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면 남해의 일출은 나를 차분히 어루만진다. 매일 아침 시골집에서 강가에 피어 오르는 물안개 위로 떠오르는 일출도 함께 느껴진다. 같은 태양도 장소가 달라지면 받아들이는 마음의 빛깔도 달라진다. 여행은 그 다름을 배우는 일이다. 낯선 풍경 앞에서 익숙함이 물러나고 굳은 생각이 유연하게 풀린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은 그 배움과 즐거움을 알기에 떠남을 즐긴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독서에서 배우고, 사람과의 만남에서 깨우치며, 여행에서 나를 가꿔간다. 그중에서도 여행은 나를 유연하게 만들고 자연으로 이끈다. 구름의 결을 읽고, 넝쿨의 물러남을 보며, 일출의 다른 빛깔을 마주하면서 나를 더 넓고 깊게 만들어 간다. 나는 오늘도 가을 하늘을 올려다 보며 줄무늬 구름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여행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