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왕봉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낮지만 높은 산’이다. 새벽에 눈을 뜨면 별다른 채비 없이 바로 안길 수 있는 산, 별 힘들이지 않고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각화저수지에서 곧바로 치고 오르면 빠르면 삼십여 분, 조금 여유를 부리면 사십에서 오십 분이면 오를 수 있으니 낮은 산이다. 실제 높이도 해발 394미터에 불과하다. 숫자로는 낮지만, 인근 봉우리에서 군왕봉을 바라보면 근처에 그를 필적할 수 있는 높은 봉우리가 전혀 없다. 덕분에 정상에 서는 순간 광주와 인근 산하가 한 폭의 파노라마로 눈앞에 펼쳐지니 이토록 높은 산이 또 있을까?

뒤쪽으로는 무등산이 넉넉한 품을 벌려 우리를 맞는다. 무등산 정상에서 왼편, 즉 북동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높고 낮은 산들을 거느린 담양 추월산이 호위무사가 돼 웅장한 자태로 서 있다. 담양 쪽 산과 들에는 늘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운해를 이룬다. 운무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방의 수많은 봉우리를 내려다보노라면 만조백관을 거느린 군왕이 된 듯한 기분이다. 선인들의 작명 솜씨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해 첫 직장으로 자리 잡았던 곳이 광주교대였다. 세상에는 나 정도의 학자가 지천으로 깔려있고, 더 유능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1990년대 초의 광주교대에서는 국내 명문대생 출신의 최초 해외박사 소지자라는 타이틀을 부여받았다. 덕분에 학생들과 지역 교육계에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고향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출·퇴근하는 기쁨도 아주 컸다. 자기 역량의 70퍼센트만 발휘해도 인정받을 수 있는 직장에 근무하라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열심히 지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더 열정적으로 재미있게 살아왔고, 첫 직장에서 퇴직까지 하게 됐다. 돌이켜보니 낮으면서도 높은 군왕봉과 비슷한 영예를 행운처럼 누리며 살았던 것 같다.

이른 새벽, 어둠을 밝힐 헤드 랜턴을 머리에 착용하고 집을 나섰다. 가파른 산길로 접어드는 순간 올가을 처음으로 입김이 눈에 보인다. 새벽 온도가 겨우 9도인데 랜턴 불빛에 하얀 숨결이 또렷해진다. 오늘은 내가 첫 발자국을 올리는 모양이다. 많은 거미줄이 얼굴을 스친다. 좁은 숲길에는 거미들이 가로질러 날아다닌 거미줄 고속도로가 많이 펼쳐져 있다. 보통은 나보다 부지런한 이들이 새벽의 그물들을 거둬 주지만, 오늘은 내가 그 역할을 맡는다. 랜턴에 비친 새벽산은 해가 오른 뒤의 산과는 사뭇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길 위에 엉켜있는 솔뿌리의 송진은 랜턴 덕에 햇빛 받은 실개천처럼 빛난다. 검은 갈색으로 반짝거리는 촉촉한 산플라나리아가 산길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어두운 새벽이 아니면 보기 힘들다.

산 오르는 것에도 총량이라는 것이 있을까? 설령 있다 하더라도 백 세를 넘겨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넉넉하리라 기대하며 살고 있다. 산 중턱을 지나니 벌써 먼동이 터와 랜턴이 필요 없어졌다. 추울까 봐 긴 팔 셔츠에 얇은 외투도 입었는데 어느새 땀이 배어나 외투는 허리에 매었다. 약간 거추장스럽던 헤드 랜턴을 주머니에 욱여넣고 나니 산행이 훨씬 가볍다.

정상에 오르니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인자한 미소로 맞이하는 무등산 앞에서, 예를 갖추듯이 옷매무새도 다듬었다. 벌써 동녘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산 아래 사수원지에서는 아름다운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멀리 담양 쪽으로는 운해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운해를 거느린 무등산, 운해에 둘러싸인 광주 시가지가 이승과 저승 사이 어딘가의 풍경처럼 아득히 아름답다.

일출을 보고 싶어서 정상에서 배회하며 기다렸다. 무등의 어깨 위로 솟아오르는 아침 해는 장엄하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하다. 펼쳐지는 무등의 햇살이 세속과 선계 잇는 속리교인양 나를 부른다. 이 햇살 속에서 오늘도 대한민국은 역동의 하루를 써 내려가리라. 만조백관 봉우리 내려다보며 잠시 군왕의 심정으로 세상을 위해 기도드린다. 평화가 늘 모두와 함께하길. 서둘러 하산하다 뒤돌아보니 아직 해가 나를 따라오지 못한 채 근처 산봉우리 꼭대기들만 비추고 있다. 가을 아침의 철 잃은 분홍 철쭉이 잠시 내 발길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