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암일기’를 보관했던 장소, 모현관(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20년간의 유배 생활

무려 20년간이나 유배 생활을 한 미암 유희춘, 그가 남긴 ‘미암일기’는 보물로 지정돼 있을 만큼 유명하다.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1513년(중종 8) 전라도 해남에서 유계린과 탐진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탐진 최씨는 ‘표해록’의 저자 최부의 큰 따님이었다. 자는 인중(仁中), 호는 미암(眉巖)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미암은 그가 태어난 해남 집 뒤의 초승달 같고 미인 눈썹처럼 생긴 바위 이름에서 따온다. 그의 부인 송덕봉은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4대 여류 문인’으로 불린다.

유희춘의 일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20년의 유배가 저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순탄치 못한 그의 삶은 부친부터 그 조짐이 있었다.

금남 최부가 갑자사화로 참형에 처해지자, 사위인 유계린은 벼슬길을 포기하고 고향에 은거한다. 그는 평생 처사로 살았지만, 두 아들 성춘과 희춘의 교육에 전념한다. 형 유성춘은 1514년(중종 9) 급제 후 이조정랑에 올랐지만,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파직된 후 1522년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16세에 부친을 여읜 유희춘은 동복으로 유배와 후학을 가르치고 있던 최산두를 찾는다. 최산두와 유계린은 김굉필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던 사이였다. 또한 형 성춘은 혁신정치의 동료이기도 했다.

미암 박물관 내부 ‘미암집’ 목판본

유희춘은 1538년(중종 33)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유가 됐고, 세자시강원 설서가 돼서는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 된다. 1543년(38) 무장현감, 1545년(인종 1) 정6품 홍문관 수찬을 지낸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받은 관직은 정6품 사간원 정언이었다.

그의 관직은 정언에서 일단 멈춘다. 명종이 즉위한 후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 일파가 대윤 윤임과 사림들을 대거 숙청한 을사사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때, 사간원 대사간 이명은 “윤임 등을 역적으로 다스림이 마땅하다”고 설득하면서, 자기편에 들 것을 강요한다. 또한 해남 출신 이조판서 임백령도 “윤임 등의 죄를 다스리려는 대비전의 뜻이 엄절(嚴切)하니 순종하면 피어날 것이고 거역하면 부서질 것인데, 그대는 홀로 있는 노모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협박하였지만, 따르지 않았다.

2년 뒤인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다시 한번 광풍이 불었고, 유희춘은 제주도로 유배된다. 그때까지는, 그의 유배가 20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의 학문이 어쩌면 이렇게 깊은가?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세상을 뜨자, 명종의 외숙 윤원형의 정치생명도 끝나게 된다. 이탁과 박순이 이끈 사헌부·사간원이 힘을 모아 윤원형을 탄핵했기 때문이다.

윤원형 탄핵 후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과 연루돼 벌을 받은 자들에 대한 신원(伸?) 논의가 일어났고,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유희춘의 유배가 풀리게 된다.

장장 20년 만이었다. 54세 유희춘에게 다시 내려진 관직은 정5품 홍문관 교리였다.

유배에서 풀린 1년 만에 정4품인 홍문관 응교, 종3품 사헌부 집의, 2년 만인 1569년(선조 2)에는 정3품 승정원 우부승지에 임명된다. 그리고 1571년(선조 4)에는 종2품 전라도 관찰사와 승문원 부제조에 임명됐고, 1573년에는 사헌부 대사헌에 오른다.

그리고 1577년(선조 10) 마지막 받은 관직은 정2품 품계인 자헌대부로 승진한 후 받은 홍문관 부제학이었다.

미암 유희춘과 부인 덕봉을 모신 사당

복권된 유희춘의 승진 속도는 매우 빨랐다. 이는 그가 갖춘 학문의 깊이에 대한 선조의 믿음 때문이었다. 특히, 경연에서의 활동은 대단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유희춘의 학문에 대한 평가가 여럿 보인다.

유희춘의 신원을 논의하면서, “천품이 온아하고 경사에 박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유배를 해제한 후 관직을 내린 선조의 평가는 압권이다.

“경(유희춘)의 학문은 어쩌면 이렇게 깊은가.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물어봐서 모르는 것이 없으니, 참으로 기특하다.”

선조는 유희춘의 박학과 암기에 감탄하고 있다.

1577년 (선조 10), 유희춘은 세상을 뜬다. 그의 나이 65세, 유배에서 풀려난 지 10년 만이었다. 그가 사망하자, 선조는 특별히 조의금을 내리고 전라감사에게 초상 치르는 일을 주관하도록 명한다. 그리고 운구차가 지나가는 고을로 하여금 상구(喪柩)를 호송하도록 했다.

선조는 좌찬성을 주증했고, 인조는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1884년(고종 21) 기대승, 이항 등과 함께 ‘호남 5현(五賢)’에 대한 문묘 배향 논의도 있었다. 문묘 배향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호남 5현 속에 유희춘이 포함된 것이다.

죽어서도 이어진 하서와 미암의 우정

미암 유희춘 시비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은 절친이자 사돈지간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화순으로 유배온 최산두의 문하였고, 유희춘의 아들 경렴이 김인후의 딸과 혼인한다. 김인후가 세 살이 위였지만, 둘은 평생 친구였다.

둘은 성균관에서 다시 만난다. 유희춘이 1538년(중종 33) 급제했고, 2년 후인 1540년(중종 35) 김인후가 급제한다. 정리하면, 나이는 김인후가 3살 많았지만, 과거 급제는 유희춘이 2년 빨랐다.

허균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에 실린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는 김인후와 유희춘의 아름다운 우정이 다음처럼 담겨 있다.

“하서가 급제하기 이전, 성균관에 있을 때였다. 그때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니 사람들이 감히 돌보지 못하였다. 미암 유희춘이 당시 성균관 관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애석히 여겨 자기 집에 메어다 두고는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나게 됐고, 하서는 이를 감사하게 여겼다.”

이들의 우정은 관직에 진출하고서도 계속 이어졌다. 1543년(중종 38) 겨울, 미암 유희춘은 고창의 무장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옥과 현감으로 있던 하서 김인후를 찾아 주희가 ‘효경’의 잘못을 바로잡은 책 ‘효경간오’(孝經刊誤) 한 질을 놓고 간다. 친구에 대한 배려였다. 이들의 남다른 우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창 선운사 도솔암 암벽에 유희춘과 김인후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우정의 하이라이트는 ‘사돈’이 되자는 김인후의 제안이었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에 이어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유희춘은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제주도가 고향 해남과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으로 옮긴다.

유희춘이 함경도 종성으로 가기 위해 육지로 나와 전라도를 지날 때 생애 마지막 만남을 갖는다. 이날 멀리 유배를 떠나는 유희춘의 처지가 걱정이 된 김인후는, 아들 경렴을 사위로 삼겠다고 약속한다.

이 부분은 이미 언급한 허균의 시문집 속 ‘성옹지소록’에 “뒷날 미암이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하나 있는 자식이 매우 어리석었다. 하서가 그를 사위로 맞이하려 하자 온 집안이 모두 찬성하지 않았지만 듣지 않고 끝내 혼인을 치르니, 사람들이 하서와 미암을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라고 기록돼 있다.

하서 집안에서는 난리가 난다. 나이 차도 많았을 뿐 아니라, 유배 간 정치범의 자식이었고, 무엇보다도 유경렴이 앞가림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김인후는 집안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유희춘과의 약속을 지킨다. 지난 성균관 시절 간병해 목숨을 구한 은혜를 갚으려 했던 것일지라도,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보물로 지정된 ‘미암일기’

우정은 유배지에서도 이어졌다.

김인후는 사돈이 된 유희춘에게 여러 편의 시를 보내 격려한다.

“아름다운 아미암 같은 사람, 어찌 이리도 생각나게 하는가. 언제 함께 평상에 앉아, 책 펴고 조금씩 갈라 밝힐 수 있을지”도 그중 하나다.

이에 유희춘는 “북쪽 변경이라 묻는 이 없건만, 하서만이 나를 생각해 주누나. 새로 지은 삼백 자의 시로, 먼 곳까지 자세히 말해주네”라고 화답한다. 그리움도 우정도 듬뿍 묻어있다.

20년 만인 1567년(선조 1), 유희춘은 유배가 풀렸지만,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김인후를 만날 수 없었다. 김인후는 유희춘의 유배가 풀리기 전인 1560년, 사망했기 때문이다.

1568년 1월12일과 13일의 ‘미암일기’에는 미암이 김인후의 집과 묘소를 찾는 내용이 다음처럼 나온다.

“유희춘이 장성에 있는 김인후의 집과 김인후의 집에서 2리쯤 떨어진 김인후의 묘소에 가서 음식을 차려 올리고, 제문을 읽도록 했다.”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 살아서의 우정이 죽어서까지 이어진 것이다.

보물 ‘미암일기’를 남기다

미암 유희춘이 유배에서 풀려 난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간 쓴 일기가 보물로 지정된 ‘미암일기’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이 일기에는 조정의 공적인 사무에서부터 자신의 일상뿐만 아니라 집안의 대소사, 심지어는 천문날씨 등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 외에도 부부의 건강을 염려해 질병의 증상이 보일 때마다 증세를 일일이 기록한 내용, 가족이 꾼 꿈을 매번 기록하고 길몽인지 흉몽인지 점친 내용, 첩이 낳은 딸들을 좋은 데 혼인시키려고 애쓴 내용, 심지어는 주변 인물과 주고받은 생선, 젓갈 등 물품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16세기 한 선비의 생애를 낱낱이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특히 ‘미암일기’는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승정원일기’ 등의 자료를 대신해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와 함께 ‘선조실록’ 첫 10년을 집필하는데 기본사료가 되기도 했다.

‘미암일기’는 2015년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 건립된 미암 박물관에 목판과 함께 보관돼 있다. 이전에는 1956년 건립된 모현관에 보관돼 있었다.

모현관은 화재와 도난을 우려해 후손들이 연못 한 가운데에 세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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