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부임한 지 반년이 지났다. 처음 마주한 전일빌딩은 마치 민주주의의 시간을 품고 있는 기념비처럼 다가왔다.

외벽에 밴 침묵은 이 도시가 지나온 고단한 여정과 민주주의가 얼마나 값진 희생으로 이뤄졌는지를 조용히 증언하고 있었다.

불과 몇 걸음 옮긴 거리, 아시아문화전당(ACC)과 동명동을 잇는 횡단보도 위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얇은 알루미늄이 구름처럼 얽힌 ‘클라우드 워크(Cloud Walk)’는 민주주의의 흐름과 시민 연대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이어지는 ACC 광장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젊은이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외국인들도 공연에 참여한다. 도서관의 아이들은 책 속에 미래를 그리고 카페에는 여러 언어가 흘러든다.

이 모든 풍경은 마치 살아 있는 시민 교육의 현장 같다.

이러한 일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민주화의 아픔과 슬픔이라는 공동체적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 위에 세워져 있으며 광주는 그 역사를 도시의 공기 속에 담고 있다.

2025년 6월 기준 국내에는 약 274만명의 외국인과 이민자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광복 이후 귀화자는 25만5천여명, 영주자격 소지자는 20만2천여명에 달한다.

이처럼 약 5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제 한국은 본격적인 이민사회로 접어들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가치와 시민적 역량을 다음 세대뿐 아니라 이민자와 귀화자에게도 함께 전수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정치철학자 윌 킴리카는 시민성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함께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능력”이라 했다.

‘같아짐’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힘’이라는 그의 통찰은 이민사회로 진입한 한국이 지향해야 할 시민성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준다.

이런 점에서 광주는 다음 세대는 물론 이민자와 귀화자에게도 시민됨을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접하고 체험할 수 있는 장(場)이다.

전일빌딩, 망월동 골목, 5·18 묘지, ACC 광장, 클라우드 워크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는 과거의 아픔을 담은 유산이자, 민주주의의 기억을 일상 속에 품고 공동체적 품격을 가르쳐주는 살아 있는 교실이다.

역사와 가치에 공감하고, 공동체의 미래에 참여하는 감각을 함께 키워가는 일, 그것이 바로 시민성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민성은 법과 제도만으로는 온전히 길러질 수 없다.

특히 귀화자나 이민자에게 있어 시민성은 단지 국적의 부여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역이 품은 기억과 장소성, 그리고 공동체적 감정의 층위 속에서 비로소 체화된다.

예컨대 광주가 품은 민주주의의 날줄 위에, 강진의 사유와 절제, 담양의 정자문화, 화순의 고요한 일상 같은 씨줄이 엮일 때 성숙한 시민 의식의 품격이 완성된다.

중앙정부가 제도적으로 시민성을 인정하고 부여한다면, 지역은 그것을 삶의 맥락 속에서 실천하도록 이끈다.

얼마 전 광주의 한 대학 총장이 몽골을 방문했을 때 현지 당국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준비해 이 노래가 몽골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

이는 광주가 단지 과거의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 연대와 자긍의 상징으로 세계에 기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시민됨은 중앙정부만의 과제가 아니다.

삶의 현장에 가까운 지방이 그 실천의 무대를 먼저 열어야 한다.

독일 베를린이나 노르웨이 오슬로가 과거의 상처를 교육 자산으로 삼아 후세대와 이민자에게 민주주의를 체험하게 했듯 광주와 전남도 그 역할을 체계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

이곳은 단지 ‘기억의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시민의 삶을 시작하는 ‘경험의 공간’이 돼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다음 세대와 이민자 세대라는 서로 다른 두 흐름을 아우르며, 민주적 가치를 전수하고 시민성을 키워야 하는 시대적 과제 앞에 서 있다.

그 중심에서 지역이, 특히 광주가 앞장서 시민적 역량을 체화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이뤄내야 할 가장 구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