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황혼의 3인(三人) / 수필 - 김정숙
- 재생 준비중
2025. 03. 17(월) 20:22 가+가-
“세 마리요.”
난데없이 튀는 말에 입구를 바라보니 늙수그레한 사내 둘이 들어온다. 일행이 셋이라는 소리일 텐데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전화로 그를 호출하는지 발신음이 연신 울리고,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잇따른다. 네댓 테이블에 벌려 앉은 식당 손님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흡사 자기 집 안방인 양 부전스럽다. 우리 뒷자리에 착석, 비빔밥 3인분을 시키고선 다시 전화를 건다. 신호음은 길게 이어지고 벨소리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온다.
“아이고 이제 오네. 황비홍, 어서 오싰쇼.”
황비홍? ‘세 마리’ 못지않게 튀는 이름으로 불린 이는 뜻밖에 여인이다. 남자들보다 대여섯 살은 너끈히 더 들어 보이는, 풍채 좋은 이가 털 슬리퍼를 끌며 들어온다.
“근데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갑자기 아들이 왔단 말이요. 미역국 끓이고 찰밥 해서 생고기까지 사 가지고 왔지 뭐요. 그러니 안 먹을 수가 없어서 한술 뜨고, 아들 보내고 오느라고…. 이따 우리 집 가서 생고기 자시고 가싰쇼.”
남들이 듣든지 말든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크지 않은 공간을 장악한다. 여장부의 품새다. 의아했던 별명도 적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그치지 않는 발신음과 벨소리의 이중창은 그녀가 자리에 앉고 나서야 잠잠해진다.
이곳은 남편과 내가 도서관 다녀오는 길에 종종 들르는, 도심 뒷골목의 주택을 개조한 오래된 식당이다. 제법 맛에 정평이 나 있는지 점심때는 번잡하다 싶을 만큼 붐빈다. 근처에 밀집된 화방과 갤러리를 찾아온 사람들과 직장인, 우리처럼 한가로이 집 밖으로 나온, 은퇴한 노년들까지 뒤섞여 성황을 이룬다. 음식 주문하는 소리, 시국(時局) 성토에 높아진 언성, 가벼운 농담과 웃음소리, 젓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까지 혼성된 소리들이 식사의 일부가 되어 귓전을 파고든다. 하지만 저녁에는 여느 곳보다 빨리 찾아온 뒷골목의 정적에 실내는 한산하고, 소리도 맥을 못 춘 채 소곤소곤 은밀해진다. 등장부터 요란하게 시선을 끈 그들은 오늘 저녁의 이단아인 셈이다. 흥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톤은 낮아졌지만 귀를 세우지 않아도 오가는 이야기가 선명하게 들린다.
3인분의 식사가 나오자 집에서 입을 다시고 왔다는 여자는 자기 것은 포장해 달란다. 그러고는 식사를 시작한 두 남정네 앞에서 익숙하게 식사 지도를 시작한다.
“아직 많이 드실 때 아니요? 나만치 돼 보싰쇼. 먹고 싶어도 많이 못 드요.”
무슨 말끝에 구순(九旬)이라는 그녀의 나이가 나를 놀라게 한다.
“토하젓 드싰쇼. 소화에 좋다요. 너무 많이는 말고, 혀가 까부라져요.”
“황태무침도…. 요즘은 황태도 귀하답디다.”
“물김치도 맛나게 보이요. 시원하겠구만.”
비빔밥이라 반찬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남자들에게 추임새 넣듯 이것저것 권한다. ‘왜 밥을 덜 잡숫느냐?’, ‘천천히 드셔라’, 그녀의 밥상머리 잔소리는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칠 줄 모른다.
‘○회장’이라며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보아 죽마고우는 아닌 듯싶고, 허물없이 오가는 말은 사회적 친분 이상으로 보여 하루 이틀 인연이 아님은 틀림없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형제애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거실의 용설란 화분을 옮기려는데 너무 커서 힘들다는 여자의 말에 두 남자가 동시에 밥심을 자랑하며 벌떡 일어난다. 밥값은 애초에 여자의 몫이었는지 누런 지폐를 손에 쥔 채 뒤따르고, 계산대 앞의 그 흔한 실랑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등장은 요란했으되 퇴장은 순순하다.
처음엔 좀 거슬렸다. 노인들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거침없는 언행이 불편했다. 그 기세가 세대를 갈라놓고, 노인 혐오를 부추기는 불쏘시개가 되는 것은 아닌지 지나치다 싶은 염려마저 들었다. 그러나 식사를 거드는 여자의 잔소리가 시작되면서 나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졌다. 한술이라도 더 맛나게 먹이려는 구순의 그녀가 늘어놓는 말이 자꾸 우리 식탁으로 건너왔다. 어느새 나는 그녀가 지휘하는 대로 토하젓을, 황태무침을, 물김치를 밥에 얹어 한 숟가락씩 입에 넣고 있었다. 여장부 같은 외모와 구순 연륜이 살가운 말과 어우러져 대모(大母)의 풍모를 풍기는 데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100세도 아니고, 새로 나온 110세 만기 보험을 아들이 넣어줬다며 넌지시 자랑을 늘어놓던 이들. 황혼의 우정이 기한 없이 이어지기를 응원하며 식당 밖으로 나오는데, 바로 앞 이층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 허겁지겁 신고 온 티가 역력했던 털 슬리퍼의 수수께끼가 풀린다.
<김정숙 약력>
▲전 광주 다산학원장
▲광주문학 신인문학상 수필부문 당선
▲광주문인협회 회원
난데없이 튀는 말에 입구를 바라보니 늙수그레한 사내 둘이 들어온다. 일행이 셋이라는 소리일 텐데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전화로 그를 호출하는지 발신음이 연신 울리고,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잇따른다. 네댓 테이블에 벌려 앉은 식당 손님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흡사 자기 집 안방인 양 부전스럽다. 우리 뒷자리에 착석, 비빔밥 3인분을 시키고선 다시 전화를 건다. 신호음은 길게 이어지고 벨소리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온다.
“아이고 이제 오네. 황비홍, 어서 오싰쇼.”
“근데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갑자기 아들이 왔단 말이요. 미역국 끓이고 찰밥 해서 생고기까지 사 가지고 왔지 뭐요. 그러니 안 먹을 수가 없어서 한술 뜨고, 아들 보내고 오느라고…. 이따 우리 집 가서 생고기 자시고 가싰쇼.”
남들이 듣든지 말든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크지 않은 공간을 장악한다. 여장부의 품새다. 의아했던 별명도 적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그치지 않는 발신음과 벨소리의 이중창은 그녀가 자리에 앉고 나서야 잠잠해진다.
이곳은 남편과 내가 도서관 다녀오는 길에 종종 들르는, 도심 뒷골목의 주택을 개조한 오래된 식당이다. 제법 맛에 정평이 나 있는지 점심때는 번잡하다 싶을 만큼 붐빈다. 근처에 밀집된 화방과 갤러리를 찾아온 사람들과 직장인, 우리처럼 한가로이 집 밖으로 나온, 은퇴한 노년들까지 뒤섞여 성황을 이룬다. 음식 주문하는 소리, 시국(時局) 성토에 높아진 언성, 가벼운 농담과 웃음소리, 젓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까지 혼성된 소리들이 식사의 일부가 되어 귓전을 파고든다. 하지만 저녁에는 여느 곳보다 빨리 찾아온 뒷골목의 정적에 실내는 한산하고, 소리도 맥을 못 춘 채 소곤소곤 은밀해진다. 등장부터 요란하게 시선을 끈 그들은 오늘 저녁의 이단아인 셈이다. 흥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톤은 낮아졌지만 귀를 세우지 않아도 오가는 이야기가 선명하게 들린다.
3인분의 식사가 나오자 집에서 입을 다시고 왔다는 여자는 자기 것은 포장해 달란다. 그러고는 식사를 시작한 두 남정네 앞에서 익숙하게 식사 지도를 시작한다.
“아직 많이 드실 때 아니요? 나만치 돼 보싰쇼. 먹고 싶어도 많이 못 드요.”
무슨 말끝에 구순(九旬)이라는 그녀의 나이가 나를 놀라게 한다.
“토하젓 드싰쇼. 소화에 좋다요. 너무 많이는 말고, 혀가 까부라져요.”
“황태무침도…. 요즘은 황태도 귀하답디다.”
“물김치도 맛나게 보이요. 시원하겠구만.”
비빔밥이라 반찬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남자들에게 추임새 넣듯 이것저것 권한다. ‘왜 밥을 덜 잡숫느냐?’, ‘천천히 드셔라’, 그녀의 밥상머리 잔소리는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칠 줄 모른다.
‘○회장’이라며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보아 죽마고우는 아닌 듯싶고, 허물없이 오가는 말은 사회적 친분 이상으로 보여 하루 이틀 인연이 아님은 틀림없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형제애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거실의 용설란 화분을 옮기려는데 너무 커서 힘들다는 여자의 말에 두 남자가 동시에 밥심을 자랑하며 벌떡 일어난다. 밥값은 애초에 여자의 몫이었는지 누런 지폐를 손에 쥔 채 뒤따르고, 계산대 앞의 그 흔한 실랑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등장은 요란했으되 퇴장은 순순하다.
처음엔 좀 거슬렸다. 노인들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거침없는 언행이 불편했다. 그 기세가 세대를 갈라놓고, 노인 혐오를 부추기는 불쏘시개가 되는 것은 아닌지 지나치다 싶은 염려마저 들었다. 그러나 식사를 거드는 여자의 잔소리가 시작되면서 나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졌다. 한술이라도 더 맛나게 먹이려는 구순의 그녀가 늘어놓는 말이 자꾸 우리 식탁으로 건너왔다. 어느새 나는 그녀가 지휘하는 대로 토하젓을, 황태무침을, 물김치를 밥에 얹어 한 숟가락씩 입에 넣고 있었다. 여장부 같은 외모와 구순 연륜이 살가운 말과 어우러져 대모(大母)의 풍모를 풍기는 데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100세도 아니고, 새로 나온 110세 만기 보험을 아들이 넣어줬다며 넌지시 자랑을 늘어놓던 이들. 황혼의 우정이 기한 없이 이어지기를 응원하며 식당 밖으로 나오는데, 바로 앞 이층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 허겁지겁 신고 온 티가 역력했던 털 슬리퍼의 수수께끼가 풀린다.
<김정숙 약력>
▲전 광주 다산학원장
▲광주문학 신인문학상 수필부문 당선
▲광주문인협회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