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산과 들녘이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녹음뿐이다. 눈을 껌벅이는 순간마다 몸에 초록 물이 들어서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흰 벽에 기대고 서서 통구이처럼 몸을 굴리면 흰 벽 군데군데 초록 물감이 배어 어느 이름난 추상 화가의 기괴한 한 폭 그림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한여름은 구름의 세계다. 먹구름은 번개와 천둥을 동반하면서 잠깐 사나워지지만 흰 구름은 유난히 희고 커서 지상 가까이에 내려오기를 좋아한다. 그만큼 흰 구름은 여름내 상상력을 증폭시켜준다.

어느 날은 긴 잠자리채로 허공을 휘젓듯 예쁜 구름을 낚아채고 싶을 때가 있고, 또 어떤 날은 긴 막대기의 뜰채로 착한 구름을 아래에서 위로 사뿐히 걷어 올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여름 산책은 챙이 크고 동그란 농부 모자를 쓰고 나간다. 물론 그늘을 따라 걷지만 모든 길이 그늘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필자의 산책은 주로 농로를 따라 걷는데 반환점에 이르면 아주 큰 저수지를 만난다.

저수지 둑 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있어서 그 아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노라면 저수지 수면 위로 펼쳐지는 아주 신비한 현상을 발견하곤 한다.

어느 오후의 일이다. 큰 뭉게구름이 서서히 풀빵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순간 깨진 바가지 모양으로 산산조각이 나듯 흩어지면서 조각구름이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구름이 아주 볼품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다. 깨지는 거, 터지는 거, 부서지는 거, 그러니까 인간의 파행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해서 씁쓸했다.

또 어느 오후에는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떨어져서 놀고 있는 조각구름을 보았다. 그들 중에 유독 두 구름만이 부용화처럼 아름답게 몸을 꾸미고 커지더니 서로 가까이 다가가 하나가 되면서 몹시 큰 뭉게구름이 되었다. 수면을 내려다보던 필자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지만 기뻤다. 사랑의 마음은 이처럼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힘이 작용한 것이므로 부디 파행이 없기를 바랐다.

여름날의 흰 구름만 보면 그날 그때 보았던 구름의 모습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아름답지만, 또 한편으론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아 삶이 조심스러워진다.

휴일에는 일없이 마당으로 나와 해바라기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곤 한다. 그러면 주변이 불현듯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간 보지 못했던 화초들을 문득 발견하기도 한다. 그만큼 바깥 풍경들에 대해 무감각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가까이 있으므로 오히려 무신경해지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정서라 할지라도 이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순간 놓쳐버리고 후회하는 일을 겪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매사 예민한 반응으로 살다 보면 더 큰 상처들이 주위에 잠복해 있음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관계로 말하면 너무 가까워도 탈이고 너무 멀리해도 탈이 난다. 맹목과 집착, 그리고 무관심은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이것은 결국 심리적 거리와 맞닿아 있는 관계지만 상황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평정심이다.

필자는 이 평정심을 이태준(1904-1970)의 산문집 『무서록(無序錄)』에 수록된 「물」에서 찾곤 한다.

“물은 아름답다. 흐르는 모양, 흐르는 소리도 아름답거니와 생각하면 이(물)의 맑은 덕, 남의 더러움을 씻어 줄지언정, 남을 더럽힐 줄 모르는 어진 덕이 이에게 있는 것이다. 이를 대할 때 얼마나 마음을 맑힐 수 있고 이를 사귀일 때 얼마나 몸을 깨끗이 할 수 있는 것인가!

물은 보면 즐겁기도 하다. 이에겐 언제든지 커다란 즐거움이 있다. 여울을 만나 노래할 수 있는 것만이 즐거움은 아니다. 산과 산으로 가로막되 덤비는 일 없이 고요한 그대로 고이고 고이어 나중날 넘쳐 흘러가는 그 유유무언(悠悠無言)의 낙관(樂觀),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물은 성(聖)스럽다. 무심히 흐르되 어별(魚鱉-물고기와 거북이)이 이의 품에 살고 논, 밭, 과수원이 이 무심한 이로 인해 윤택하다.

아름다운 물, 기쁜 물, 고마운 물, 지자(智者) 노자(老子)는 일찍이 상선약수(上善若水-최상의 선은 흐르는 물과 같다)라 하였다.”

여름은 흰 구름을 보면서 생을 반추하고 물을 통해서 삶을 배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