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계에서 일을 하다 보니 다양한 삶을 만나고 경험하게 된다. 그 중 먹먹한 기억으로 오랫동안 각인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어른스러운 아이들’을 만났을 때다. 오래전에 만났던 고등학생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을 대신해 자길 키워주신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녔다. 얼마 전 만난 스무 살의 풋풋한 친구는, 자신과 단둘이 사는 동생을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터에 뛰어들었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들의 대답은 거짓말처럼 똑같았다.“당연히 해야죠.”

이처럼 돌봄을 받아야 할 시기에 오히려 가족을 돌보고 있는 아동을 ‘가족 돌봄 아동’이라고 한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다. 아직 우리나라엔 이를 규정할 명확한 법이나 지원체계는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3월, 가족 돌봄 아동에 대한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 의무를 명시한 법안이 발의됐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들려오는 소식은 전혀 없는 상황이다.

지지부진한 법안 제정과는 별개로, 가족 돌봄 아동을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한 노력은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5월부터 시범사업을 통해 돌봄, 가사, 심리지원 등을 지원하고 가족 돌봄 청년을 관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민간에서도 가족 돌봄 아동을 찾아다니며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초록우산에서는 나이 제한으로 제도 밖에 벗어나 있는 ‘가족 돌봄 아동’을 위한 직접 지원뿐 아니라 정책, 인식 개선 캠페인, 지원법 제정 등을 위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지자체에서도 자체적으로 ‘가족 돌봄 아동 지원 조례’를 지정해 조사 및 지원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각각 대상, 조건, 기준, 지원 내용 등이 달라서 오히려 혼선을 빚을 때도 있다. 정부 차원에서 가족 돌봄 아동을 ‘영 어덜트 케어러’(Young Adult carer)로 분류해 지원금을 주고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영국과 비교하면 아직은 아쉬운 점이 많다.

제도적 개선, 복지 지원과 함께, 우리의 사회적 시선과 인식도 변할 필요가 있다.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가족 돌봄 청소년에 대해 국가별 인식과 대응 수준에서 가장 낮은 7단계로 분류되었다. 어른스러운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했던, ‘철이 일찍 들었다, 효자·효녀다’라는 칭찬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족쇄가 되어버릴 때가 있다. 본인들이 도움이나 지원이 필요한 대상자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거나, 가족을 위한 희생이 당연하다는 말과 시선으로 힘든 상황을 표현하지 못하고 숨기면서 스스로 고립돼 복지 사각지대에 놓이는 경우도 발생한다고 한다. 칭찬이나 연민의 대상으로만 여겨질 뿐, 정작 필요한 관심과 지원은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우리가 ‘어른스럽다’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겪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조금 다른 시선으로, 조금 더 많은 관심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아이들에겐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하는 손길이 아니라, 힘든 마음을 만져주며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손길이 더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