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잎, 자줏빛 색깔 하나 섞이지 않은 하야디 하얀 꽃버무리가 내 눈 밑에 펼쳐져 있다.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듯도 하고, 흰 솜털이 몽실몽실 뭉쳐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한낮 고요하기만 한 3월 마지막 날 아파트 뜰 풍경이다.

지난주 수원에서 내려오는 고속도로 주변에 개나리 울타리가 노랗게 꽃빛을 뿜어 기분을 상쾌하게 하더니, 집에 도착하자 아파트 입구에 늘어선 벚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며 귀향을 반겼다. 유독 바람마저 잔잔해 다른 해보다 꽃이 풍성하고 만개의 시간도 긴 듯하다. 수령이 오래된 벚나무가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으니 먼 걸음을 하지 않고 벚꽃을 해마다 가까이서 즐길 수 있다. 그러니 내가 하는 꽃구경은 항상 지나던 길가나 집 앞에 핀 꽃을 보며 감탄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꽃을 보지 못하고 살아온 듯한데 여유가 없어서라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댔지만 그 여유는 경제적 여유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였을 것이다.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꽃인데 돈 들 일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에게 지치고, 스스로에게 지쳐가며 봄꽃을 보는 눈을 잃은 채로 살았다.

그러고 보니 화창한 봄날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에 얽힌 사연 하나쯤 있을 법한데 아무리 쥐어짜 봐도 맹탕이다. 덧없는 이별, 유한한 인생의 허무함을 표현할 때면 곧잘 이 꽃에 비유하곤 하던데 나는 글의 정서와 현실의 감정이 별개인 존재인가 보다. 되짚어 봐도 내 인생에 부러 꽃 나들이 가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마지못해 가야 할 상황에는 “내가 꽃인데 뭘 보러 가.” 어깨를 으쓱해 주변 사람들이 기막히다는 듯 실소했다. 이러니 벚꽃의 화사함에 감탄하기보다는 개화가 다른 해보다 이르면 가뭄이 심하고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긴다는 얘기가 먼저 와닿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주름이 가져다준 변화일까? 올해에는 나도 남들처럼 꽃놀이도 가고 산책도 해보리라 생각했다. 그저 이제나 저제나 꽃 피기만 기다렸는데, ‘아이쿠! 언감생심 꽃구경은 무슨….’ 생뚱맞은 바람이 화를 부른 건 아닐까. 하필 찾아든 코로나 때문에 바깥 구경은커녕, 방 안에서 끙끙 봄날을 보내야 하다니.

봄꽃 구경은 다 끝났구나 싶었는데 무슨 조화일까. 한동안 된탕 앓고 내다본 창밖에는 여전히 눈부시게 하얀 벚꽃이 화려하게 치장을 한 채 매가리 없는 나를 향해 웃어 보인다. 한참 늦은 나를 기다려주며 꽃이 무르익고 있었다.

겨우내 북풍과 맞섰던 놀이터 나무들도 며칠 새 화려한 꽃대궐을 이루어냈다. 베란다에서 열기 어린 몸으로 햇빛에 하얗게 반짝이는 향연을 흠뻑 즐기며 앞산을 바라보니 연초록 잎새 사이로 희끗희끗 산벚나무꽃도 깊어가는 봄을 알리고 있다. 꽃길 따라 마실 나간 내 마음은 어느새 숲 내음 가득한 벚꽃 터널 아래 서 있다. 조곤조곤 속살대는 꽃들의 언어에 귀 기울이며, 두꺼운 부엽토 아래 바지런한 봄의 몸놀림으로 돋아난 새순들의 푸릇한 향기에 코를 벌름대본다. 눈이 맑아지고 목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매년 매화 소식이 사그라들고 개나리꽃 질 무렵이면 벚꽃은 피어나 상춘객들이 심심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거의 동시에 봄꽃들이 피는 것 같다. 이 중에서도 오랜 기다림 끝에 한꺼번에 해사한 꽃무리로 피어나 아주 잠시 머물다 훌쩍 떠나는 벚꽃은 아쉬울 때가 많다.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불면 꽃비가 되어 흩날리며 여기저기 꽃무덤을 이루어 지나가는 우리의 신발 바닥에 짓이겨지며 흔적이 사라지곤 했다.

가까이서 접할 수 있고 눈 호강을 시켜주니 저절로 관심이 가는 벚꽃이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시선만 돌려도 보이고, 지나치며 꽃이 피고 지고를 알며, 버찌 열매를 맺어 새들에게 먹잇감을 제공하는 벚나무. 한동안 일본문화를 대표하는 사쿠라란 이름으로 무시도 당했지만 원산지가 이 땅인 것들이 있음이 밝혀져 그 오명이 조금은 희석되었다.

다시금 내려다보니 꽃나무 위에서 두 마리 새들이 파닥거리고 있다. 향에 취해 꽃물결 속에서 접영 하듯 날개를 펼치며 이리저리 고갯짓을 해대니 꽃비가 내려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꽃그늘 아래를 지나치며 저마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사진을 찍느라 골몰하는 모습이다.

언제 우리가 시선을 하늘을 향해 둘 때가 자주 있던가. 발끝과 도로에 시선을 둔 채 오늘에 급급해하며 살아가는 우리이지 않은가. 흉흉한 세상살이 소식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는 벚꽃의 선심. 잠시 지나가는 꽃일망정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 같아 사랑스런 눈빛으로 보게 된다. 이른 아침 햇살에 빛나는 꽃이파리가, 석양 무렵 붉게 반사되어 물든 꽃의 아름다움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렇게 내게도 슬며시 벚꽃은 피었는데 아직도 달 뜬 몸으로 맘껏 즐기질 못하고 있다. 설마 간밤에 지나가는 봄비에, 때 모르는 광풍에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마음 졸이며,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낭만이 철철 넘치는 벚꽃 엔딩을 버스커버스커가 되어 흥얼거려 본다.

<장소영 약력>
▲한맥문학 등단
▲광주문협회원
▲광주문학 편집위원(현)
▲월간 전시가이드 ‘쉼터’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