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창문을 열다 / 수필 - 이명사
2023. 12. 04(월) 19:58 가+가-
창문의 역할은 다양하다. 답답한 집안 공기를 맑고 신선한 공기로 순환시키기도 하고, 또 창문을 통하여 조용하고 편안한 동네를 바라볼 수 있는가 하면 함박눈 날리는 아름다운 정경도 아늑하게 볼 수 있게 한다.

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르기만 해도 갑자기 방안은 환해지고 신방이 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거기에 작은 코스모스 한 송이 잎사귀와 함께 발라놓으면 창문은 상큼한 미술관이 되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어머니 처녀 적, 밤이면 수놓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밤 깊어 가는 줄 몰랐다. 그 시대 여자들은 거의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집에서 살림하는 것 배우고 바느질과 길쌈하는 것 잘 배워 시집가서 아이 낳고 시부모님 공경하며 사는 것이 부모님들의 바람이었고 자신도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깨어 있는 분이었다. 동네에 야학당이 생겼다. 어머니의 창문이 열린 것이다. 자작일촌이었기에 거의 모두가 친척이었다. 글을 배우고 셈하는 것을 배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여자가 나다니면 안 된다고 야단치셨지만 공부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 창문은 어머니에게 밝은 빛으로 다가왔다.

부모님이 주무시는 것을 기다려 몰래 야학당에 가서 공부했다. 공부를 잘해서 어머니는 성적이 좋았는데 친척 오빠가 하도 수학을 잘하는 바람에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줄곧 2등만 했다.

그때 배운 한문 공부, 역사 이야기, 위인들의 이야기가 어머니의 가슴에 고이 간직되어 가고 있었으며 세상에 대한 넓은 시야도 가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희고 청초하게 지적인 면까지도 갖춘 멋진 아가씨로 성장했다.

어머니에게 다른 또 하나의 문이 열렸다. 영암에서 훌륭한 가문으로 한창 훈김이 넘치는 집안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양쪽 집안이 흡족함으로 결혼이 성립되었다.

신랑 각시가 처음 보는 첫날밤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부드럽고 잘생긴 신랑에게 온 마음을 빼앗겼다. 막연히 동경해 오던 그 사람은 왕자님처럼, 밝은 태양처럼 그렇게 찾아와 뜨거운 사랑의 창문을 활짝 열게 했다.

친정에서도 대가족이었고 큰 딸이었기에 많은 일을 했는데, 시댁도 친정 못지않았다. 시할아버지 할머니, 시부모님, 칠 남매의 장손 며느리로, 또 많은 일꾼과 가사도우미들로 온 집안이 항상 북적거렸다.

부잣집 큰 며느리는 일 부자라는 말이 있다. 어머니의 하루는 새벽부터 밤중까지 쉴 틈이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를 기다리는 창문은 어머니를 행복하게 했다. 늦은 밤에야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들어오는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창문은 항상 다정다감하고 고생했다는 위로의 말로 활짝 열려 있었다.

아버지가 목포의 한 신문사 편집부장으로 직장을 얻어 떠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남편을 따라가 살고 싶어서 삼 일을 굶으며 허락을 받고자 했지만 할머니의 창문은 자물쇠 채워진 철창문처럼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 후부터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의 창문만 열어 놓은 채 기다림의 세월이었다.

광복을 맞이했지만 시대는 어수선하고 지식인들은 이데올로기로 이상을 꿈꾸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할아버지는 깊은 산골 마을에 아주 작은 방 한 칸을 얻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피란시켰다.

11월이라지만 유난히 춥고 눈이 쏟아지던 밤, 밖에서 늦게 돌아온 아버지는 먼 친척 여동생까지 와 있는 좁은 방에서 지낼 수 없어서 이웃 마을 사랑방으로 자러 갔다가 제자의 총탄에 스러졌다. 제자는 자기가 존경하는 스승님을 돌아가게 했다고 마루에서 뛰며 뒹굴며 울부짖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통곡이었다.

아버지 서른넷, 어머니 꽃 같은 나이 서른둘, 4남매와 유복자를 남긴 채였다. 사랑 가득했던 아버지의 창문은 영원히 닫혀지고 하늘에서 내려온 만사를 타고 훨훨 날아가 버리니 어머니는 소낙비 되어 흐르는 눈물도 쏟아내지 못하고 창자 끊어지는 아픔을 가슴이 터지도록 참아내야만 했다.

설상가상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바로 목포 공업학교 교감이 된 시동생이 목포 쪽에서 불이 벌건 것을 보고 학교가 위험하다며 나간 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막내 시동생도 갓난 아들 한 번 들여다보고 나가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졸지에 청상이 되어 망연자실하는 어린 동서들을 끌어안아야 했다. 세 아들을 잃은 부모님의 피 토하는 아픔도 등에 무거운 짐으로 짊어져야만 했다.

어머니는 동서들을 향한 따스한 창문을 열어 놓았다. 위로하고 같이 아파하며 조카들까지 맡아 기르며 동서들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에 힘쓸 수 있게 해 주었다. 부모님에게는 꿋꿋하게 집안의 기둥이 되어 가문을 지켜나가야 하는 큰며느리로서 무거운 책무도 감당해야 했다.

어머니의 창문은 곳곳에 열려 있었다. 가난한 이웃들에게 보리쌀 몇 됫박, 쌀 두어 되 할머니 몰래 보내주는 문, 밤새워 재봉틀 돌려 옷 만들어 헐벗은 아이들과 사람들에게 입혀주는 문, 글 모르는 젊은 댁들을 모아 까막눈 틔워주는 문, 친정을 향한 따스한 문, 시누이들을 향한 살뜰한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문으로는 항상 나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농번기 한창 바쁠 때에도 먼저 달려와 우리 집 일을 해 주었고 동서들은 형님을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조카들은 큰어머니께 늘 감사를 표했다.

어머니의 그 열린 문으로 인해 우리는 사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함께 자랐고, 지금도 친형제 자매처럼 만나면 반가워하고 무슨 일이 있든지 모두 함께하며 서로 아낌없이 나누는 문을 열어 놓고 도우며 살고 있다.

<이명사 약력>
▲‘동산문학’ 수필 등단, ‘문학공간’ 시 등단
▲한국문인협회, 광주문인협회 회원
▲동산작가문학상 수상
▲시집 : ‘찻잔에 쓰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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