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민주화운동 사랑방 ‘봉심정’](15)위성삼
“목숨 걸고 민주화 위해 싸운 사람들 알리겠다”
5·18 열흘간 계엄군에 투쟁…최후항쟁 때 도청 총경비
전일빌딩 해설사로 활동…“봉심정 살아있는 교육의 장”
2022. 08. 28(일) 20:01 가+가-

위성삼(68)씨는 1980년 5월 도청 내 총경비를 맡아 계엄군에 맞서 열흘간 끊임없이 투쟁했다. 위씨는 현재 전일빌딩 245에서 해설사로 5·18민주화운동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내 등에 ‘극렬’이라고 쓰더라고…이후 상무대 영창에 끌려가 힘든 시간 보냈지 뭐.”

위성삼(68)씨는 1980년 5월 도청 내 총경비를 맡았고, 계엄군에 맞서 열흘간 끊임없이 투쟁하다 최후의 항쟁에서 총상을 입고 상무대로 끌려갔다.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를 졸업 후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에 74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1980년 5월19일 최초 발포를 확인한 목격자이기도 하다.

위씨는 중학생 시절 삼선개헌 후 옳고 그름에 대한 이분법적 기준으로 배우는 교육에 대해 의문을 가졌고,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김대중의 연설장을 직접 찾아 듣고 시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군대를 다녀온 후 그는 1979년 반유신과 민주화를 염원하며 소용돌이치는 시국을 신문, 뉴스로 접했고 운동권 체계에 속해있진 않았지만, 마음은 의협심과 정의감으로 끓어올랐다.

이처럼 민주화 열망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 열린 5월15일 민주 대성회에 위씨는 조선대학생으로 참여했고, 다음날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횃불시위 행진을 이어갔다.

‘국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박관현의 연설에 감동받은 시민들이 하나둘 길거리로 모여들던 때였다.

이후 매일 시위대와 거리에서 ‘전두환 타도,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는 19일 당시 계림동 파출소 인근 사촌 누나의 집을 찾았고 장갑차에서 군인이 내려 최초로 발포한 것을 목격했다.

위씨는 실제 발포가 있을 거로 생각지 못하고 ‘공포탄이다’라고 소리질렀지만 이후 고등학생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것을 발견했다. 달려가서 부축했을 때 그는 피 흘리는 학생의 동복 마이에 달린 조대부고생 명찰을 확인했다.

실제 발포를 목격한 시민들은 혼비백산해 뿔뿔이 흩어졌고 위씨는 학생을 인계하고 다시 시위대로 합류했다.

21일 위씨는 이런 상황을 타 지역에도 알려야 한다면서 방직공장 여직원들 30여명, 시위대 등 총 50여명과 버스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하지만 광주쪽에서 나주방향으로 지프를 타고 온 사람은 이들을 향해 ‘광주에서 오후 1시 집단발포를 시작했다’고 알렸고 일행은 살기 위해서 총이 필요하단 생각으로 나주경찰서 무기고로 방향을 돌렸다.

이후 젊은이 20여명만 남아 무기를 가지고 광주로 돌아왔고 광주공원에서 집합했다.

그는 군대에서 배운 대로 청년들에게 총기를 다루는 교육을 시작했고 각자 건물을 분산해 맡아 지키기로 하고 흩어졌다.

위씨는 25일 궐기대회에서 만난 대학생 수습위원회 윤상원의 인솔하에 도청 수습을 위해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그곳 3층에서 그는 윤강옥을 처음 만났다.



위씨는 경비대장을 자처했다. 또 YWCA에서 온 80여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총기 교육을 시키고, 조사부에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강경 진압이 확실시된 26일 도청 내부는 혼란스러웠고 그는 조를 편성해 방어 전선을 구축했다.

최후의 항쟁날 새벽, 1층 상황실에서 계엄군의 유탄에 어깨를 맞은 위씨는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영화 구경하는 것 같지?”라고 말하던 공수부대원은 유리창을 젖히고 총을 쏘면서 그 자리에서 시민과 학생들을 연행했다.

그의 등에는 사전에 이미 제공된 정보대로 ‘극렬’이라는 문구가 적혔고 그는 주머니의 실탄이 적발돼 심한 구타를 당해야 했다.

이후 1982년 석방된 위씨는 이듬해 윤강옥과 재회했다.

윤강옥은 위씨를 봉심정으로 안내했고 이강, 김정길, 박세정 등 70년대 운동권과도 인연을 맺었다. 윤강옥은 봉심정과 김정길의 집에서 1년여간 기거했으며, 1970년대부터 봉심정을 찾아 후배 양성과 반유신·민주화를 위해 매진한 주요 민주인사다.

이들은 봉심정에서 5·18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논의했고, 1983년 청년, 교수, 목사 등 5·18과 관련돼 군부 독재타도에 힘을 실었던 전체 구속자들이 모여 구속자협의회가 구성됐다.

윤강옥은 구속자협의회 간사를 맡았고 위씨는 조력자 역할을 해오다가 이후 간사를 맡게 됐다.

이후 5·18민중혁명 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때 위원장은 홍남순이고 김대중, 김영삼이 고문을 맡았다.

윤강옥과 위씨는 간사를 맡으면서 전국적으로 메달을 판매해 수익금을 가지고 5·18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이 사건으로 윤강옥은 1년간 수배당해야 했고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5·18진상규명을 위해 민주정치국민운동 전남본부를 창설했다.

윤강옥은 1988년 광주청문회가 열리기 전 5·18광주민중항쟁 동지회 회장을 맡아 전두환, 노태우 등 9명을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고소했다.

위씨는 윤강옥의 고소가 당시 굉장히 충격적인 부분이었다고 증언하면서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역할을 항상 해내는 사람이 윤강옥이었다”고 회고했다.

위씨는 40년째 윤강옥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고, 현재 전일빌딩 245에서 해설사를 맡아 당시 암울했던 시대상과 목숨을 걸고 민주화를 이뤄낸 시민·열사들의 의지를 알리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위씨는 민주주의를 위해 용감했던 모든 이들이 이룬 것이 현재의 자유라면서 “6월항쟁까지 이어진 노력과 5·18 진상규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죽었는지 가슴이 멘다”고 한탄했다.

이어 “봉심정은 동지들이 모여 시국을 논하고 막걸리 한잔을 기울일 수 있었던 고향 같던 곳”이라면서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다녀간 봉심정은 독재치하에서 억압당하면서도 꽃을 피울 수 있던 곳으로 산 교육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복 기자
오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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