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민주화운동 사랑방 ‘봉심정’을 아시나요?
1969년 김정길씨가 제석산에 터 잡아…운동권 ‘해방구’
김남주·윤강옥·이강·이학영씨 등 투사들의 공부방
함성지·민청학련·5·18 등 민중항쟁으로 정신 계승
2022. 05. 08(일) 20:36 가+가-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 광주의 민주 인사들이 비밀리에 모여 공부하고 토론했던 ‘봉심정’의 문이 굳게 잠겨있다. ‘봉심정’의 옛 주인 김정길 씨가 50여년 전의 모습을 회상하며 당시의 건물 위치 등을 설명하고 있다./오복 기자

“마르지 않는 하늘샘(약수터) 물이 말라버렸어…. 절대로 마르지 않아 모두들 하늘샘이라고 불렀거든.”

지난 4일 오후 취재진이 찾아간 광주시 남구 봉선동 제석산 기슭.

뚝길을 따라 올라가던 봉심정 옛 주인 김정길(72)씨는 비탈진 입구에 풀이 무성한 공간에 조그맣게 보이는 약수터를 가리켰다.

남양휴튼 아파트를 지나 불과 5분여 남짓 경사진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니 약수터와 함께 작고 허름한 건물이 나타났다.

그는 이곳을 ‘요새’라고 표현했다. 산위에 위치해 두루 전망이 좋을뿐더러 올라오는 사람들, 지나다니는 차들이 모두 보였고 제각 묘지 뒤 산길은 들이닥친 형사들을 피해 도망치기 좋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좁은 길로 불렸던 이곳은 현재 조봉골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좁은 길을 지나 들어간 입구에는 나무토막 2개로 뱀 조심이라는 문구를 적어 출입구를 막아놓은 흔적이 보였다.

진한 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을 쑤시고, 둘러싼 나뭇잎들 사이로 내리쬐는 태양은 정남향으로 지어진 가건물 한 채를 비추고 있었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서인지 집터 주변에서 화들짝 놀란 고라니 한 마리가 산 쪽으로 달려 들어갈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곳곳에 버려진 고물들과 녹슨 쇳조각들 사이에는 아카시아 향기가 더해진 진한 흙내음이 스며들어 있었다.

버려진 닭장과 토끼장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풀들에 덮여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김씨는 “감나무 두 그루는 50년이 지나도 여전하구먼, 간식으로 많이들 먹었지… 백일홍 나무 한그루가 장관을 이뤘는데 누가 뽑아갔는지 보이지 않구먼”이라며 1970년대 봉심정의 옛 모습을 회상했다.

굳게 잠긴 가건물 뒤쪽에는 묘지들이 보였다.

성묘 때를 제외하면 사람이 찾지 않는 이 터는 1970년대 민주투사들이 수없이 드나들며 열댓평 남짓한 방에 모여 반체제 운동의 전략을 세운 하나의 산실이자 운동권의 해방구였다.

지금은 이렇게 낡고 허술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이곳은 1970-1980년 서슬퍼런 유신체제 아래서 광주의 민주 인사들이 비밀리에 모여 공부하고 토론했던 ‘봉심정’.

봉심정의 시작은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봉준 장군의 천안전씨 판서공파 제각이었던 이곳에 스무살의 청년 김정길 전 광주전남민주연합 상임대표가 정착하면서 봉심정의 역사가 시작됐다.

김씨는 “제가 처음 이곳에서 생활한 이후 김남주, 윤강옥, 이강, 이학영씨 등 우리 지역의 피끓는 청년들이 자주 찾아와 시국을 진단하고 저항과 투쟁의 방향을 논의하고 토론하는 장소였다”고 회고했다.

이곳을 거쳐간 광주·전남의 대표적인 민주인사들은 김남주, 김정길, 윤강옥, 이강, 이학영, 박석무, 박현옥, 정용화, 정상용, 노준형 등이다. 젊은 후배들이 오면 학습 시키고, 혁명사상과 반체제운동의 당위성을 공부했다.

군사정부의 서슬 퍼런 감시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이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투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 결과는 함성지, 민청학련 사건 등 70년대를 대표하는 민주화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전 세계를 울린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으로 그 정신이 계승됐다.

1970년대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광주·전남 민주열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봉심정이 이제는 흘러가는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초라하게 버티고 있다.

김씨는 “1980년 5월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날을 위해 훨씬 이전부터 민주투사들의 준비, 투쟁 등 민주주의 열망이 이어졌고, 피나는 노력이 모여 광주의 5월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서 “1970년대 민주주의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썼던 사람들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 당시 봉심정에서 만들어나간 민주열사들의 노력은 발굴하고 그 정신을 계승할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오복 기자
오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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