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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의 일본 작가 비평] (4) 한국에서 바라본 마쓰다 도키코
마쓰다 도키코는 조선인을 어떻게 그렸나(2)

2019. 08.22. 18:15:14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곳(현 오다테시).
조선인의 내면을 치밀히 그려

마쓰다 도키코가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시점에서 조선인을 그린 점과 투쟁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린 점에 대해선 이미 언급했다. 마쓰다 도키코는 조선인을 어떻게 그렸는지, 세 번째 특징을 살펴보자. 일본인 작가 중 조선인을 누구보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조선인의 내면을 치밀히 그린 점을 들 수 있겠다.

예컨대 마쓰다는 ‘땅밑의 사람들’에서 도쿠코가 사랑한 임씨의 고향을 곡성군 오곡면(梧谷面)으로 설정했다. 당시 조선인의 증언과 조선 현지사정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려낼 수 없는 부분이다.

오곡면은 공교롭게도 필자가 재직하는 전남과학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나쓰다테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로 등장하는 강씨(실존인물인 경북 청원군 출신 박씨의 모델)도 그 오곡면에서 끌려온 징용자였다. 과연 마쓰다 도키코는 곡성군 오곡면에 대해 어떤 경로를 통해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오곡면 출신 조선인에게 어떤 증언이라도 들은 것일까?
오다테시 다이세이칸 앞에 설치된 마쓰다 도키코 문학기념실 앞의 팻말.

마쓰다는 오곡면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오곡면에는 강씨의 양친이 있었다. 강씨의 형들은 만주국에서 개척민이 되어 있었지만 양친은 일본에서 말하는 시골뜨기 농민이었다. 재배한 쌀의 반 이상을 지주가 가져갔고, 그나마도 공출로 빼앗겼다. 공출을 재촉할 때는 일본인 면직원이 부추기면 농민 한둘은 물어뜯어 죽일 수 있는 셰퍼드를 앞세웠다. 봄에는 물을 머금은 소나무 줄기 내피를, 여름에는 쑥을, 가을에는 칡넝쿨을 끌어안고 굶주림을 피했다. 면의 각 농부 집에는 식용수를 위한 우물조차 없었다. (‘땅밑의 사람들’ 에서)

이 장면을 묘사할 당시의 마쓰다는 누군가(아마 조선인)에게서 들은 곡성군 오곡면의 상황을 되새기며 눈감은 채 그 풍경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조선인 징용자의 심부까지 꿰뚫을 정도로 그들에게 동정과 이해를 보인 마쓰다. 그는 조선인의 고통스런 심적 상태와 빈곤한 일상을 충분히 그려낼 만큼의 정보를 얻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리얼한 표현은 조선인 징용자의 생생한 증언을 어떤 형식으로든 여러 번 접했을 작가의 체험을 상기시킨다.

곡성군은 전남 동북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전북 남원군, 순창군과 인접해 있다. 예부터 전 지역에 준봉이 솟아 있었으므로 하나오카의 풍경과는 정취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일하면서 생활하는 데에 나름 행복을 느끼는 농민들이 소박한 일상을 영위하는 농촌지역.

하지만 일본제국주의는 평화로운 조선 남부의 오곡면 주민에게 ‘공출’을 강요했거니와 임씨나 강씨와 같은 청년을 하나오카 광산으로 강제 연행해 노동력을 착취했다. 조선인 징용자의 고통과 애환, 나아가 작품 속에 그들의 운명적인 이별을 그려내는 마쓰다의 필치는 조선인 징용자의 시점을 그대로 대변했다.

마쓰다는 그 조선인 징용자의 시점을 통해서 철저히 조선인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열차 안과 열차 밖에서 세 사람은 모국어로 짧게 이별의 인사말을 나누었다. 그리고 굳게 악수했다. 이때만은 강씨의 창백한 얼굴에 생생하게 혈기가 비쳤다. 그리고 강씨는 두 사람에게 요코다 사다키치에게 전할 말을 부탁했다. 그 당시 누구보다 먼저 동굴에 뛰어들어 자신을 구출해준 지주공, 그 일본인 광부(강씨는 그 사내가 요코타 사다키치라는 사실도 임씨와 정씨에게 전해 듣고 비로소 마음에 새겼다)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떠하는 자신의 마음을 아무쪼록 두 사람을 통해 전하니 용서해 주도록.
마쓰다 도키코 문학기념실에 전시된 조선인들이 갱내에서 사용하던 일본식 곡괭이.

임씨나 정씨 그리고 강씨에게 일본은 조국의 주권을 강탈한 가해 당사자. 임씨는 그 가해 당사자, 즉 “일본제국주의―일제라 불리는 대상, 그 ‘일제’에 대한 보복이야말로 자신들 조선인 노동자의 임무라는 사실을 정씨에게 듣고 비로소 깨달았다”고 말한다. 즉 응징하기 위해 맞서야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시선은 가해자=일본, 피해자=조선의 구도, 나아가 조선인 징용자가 일본제국주의를 증오하며 거기에 대항한다는 단순한 해석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곳에는 인간을 동물처럼 혹사하는 무자비한 권력에 맛서는 빈민층의 피와 눈물이 녹아 있다. 또한 극단적 상황에서 동료인 노동자를 구한 뒤 서로 얼싸안는 감동과 격정의 모습이 교차한다. 사다키치의 도움으로 살아난 강씨는 도저히 일상에 적응할 수 없어 오곡면으로 귀향하는데 일본인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한 채 하나오카 광산에서 일본제국주의 강화정책에 혹사당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시간을 회상하면 그에게 일본에 대한 증오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설명한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강씨는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일본인 동료들과의 교류를 통해 절실히 맛봤다.

“여러분, 고마워요. 여러분, 고마워요”라고 되풀이하는 강씨. 하지만 “강씨가 마지막으로 분명히 표현할 수 있었던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고 일부러 덧붙이는 작가의 의도. 거기에서 구체적인 언설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는 조선인 징용자와 일본인 노동자의 교감, 조선인 등장인물의 내면을 치밀히 그려내는 일본인 작가 마쓰다 도키코의 따뜻한 시선이 읽힌다.

1975년에야 실상이 알려져

일본 동북지역의 조선인 징용실상에 대해선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었다. 일본 지식인과 재일조선인이 합동으로 ‘동북지방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을 꾸려 아키타현 북부 광산지대의 현지조사에 임한 것은 1975년. 이때 하나오카 광산에서 노동하던 조선인 34명이 증언을 해 언론(아사히신문 아키타판) 등을 통해 그 실상이 알려지게 됐다(노조에 겐지, ‘아키타의 조선인 강제연행’, 1999).

노조에에 따르면 ‘모집’이라는 구실 하에 조선인 징용자 1진이 이 지역에 끌려온 것은 1942년 7월. 그 조선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회사에서는 “조선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반도인(半島人)으로 부르도록”이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사택마다 뿌렸다고 하니(같은 책), 조선인에 대한 대우가 어떤 것이었는지 익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같은 해 2진으로 끌려온 김종렬씨는 26세 당시 밭일을 하고 있었다. 면사무소에서 부르더니 “일본의 하나오카로 가라”고 해서 임금 등 조건을 물어볼 여유도 없이 면에서 군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동료 100여명과 함께 가족의 환송이 금지된 상태에서 일본으로 끌려왔다. 하나오카에 도착할 때까지 죄인취급을 받았다고 증언했다(같은 책).

오곡면에서 끌려온 임씨와 강씨의 징용과정도 다를 바 없었을 터. 더구나 노조에는 4천500명의 조선인이 하나오카 광산에서 노동에 내몰리고 있었는데, 조선인의 묘지도 없었으며 화장한 흔적도 없었다는 지적을 했다(조선인 증언).

마쓰다의 작품 속에는 지역주민이 우연히 땅 속의 유골을 발굴하는 예가 있었다는 내용이 수차례 나온다. 위의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임에 틀림없다. 하나오카 광산에서 조선인 100여명이 사망했다고 하는 증언이 있음에도 자료나 흔적이 없다고 하니(노조에 겐지), 땅을 헤치면 우연히 발견되는 유골을 잡초가 빨아들이며 자라고 있다는 마쓰다의 표현(‘하나오카 광산을 찾아서’)처럼 비극적이다. 1950년 가장 먼저 현지조사에 나선 마쓰다 도키코가 얼마나 선견적인 태도를 보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골 발굴에도 조선인이 앞장서
김정훈 <일본 간세이가쿠인대 문학박사, 주오대 정책문화종합연구소 객원연구원, 전남과학대 교수>

네 번째 특징으로 중국인 희생자 유골 발굴에도 조선인이 앞장섰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 하나오카 광산 현지탐방과 희생자 유골수습에 빠뜨릴 수 없는 실제인물이 조선인 김일수(金一秀). 경상도 출신인 그는 하나오카 광산으로 끌려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애를 낳고 세대를 이룬 조선인 징용자였다.

그가 당시 희생당한 중국인 포로의 유족대표를 맡았으니 아이러니한 일. 한수산 『군함도』의 결말에는 원폭피해를 입은 희생자의 사체를 조선인이 수습하는 장면이 휴머니즘의 시점에서 그려진다(실제 사건을 형상화). 징용 피해자인 입장임에도 김일수 등의 조선인이 유골수습에 앞장섰음은 물론 마쓰다 도키코의 현지 안내를 담당했으므로 닮은 사례이다. 조선인들은 시대와 계급을 초월해 휴머니즘의 상징이 되어 그들의 참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마쓰다 도키코에게 김일수는 조선인 징용자와 중국인 피해의 실상을 전한 길라잡이었던 셈. 마쓰다 도키코는 김씨가 안내한 조선인 희생자 11명이 묻힌 곳에 도달해 김씨에게 “연중 공양의 꽃이 피어오르고 있죠”라는 말을 듣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김씨에게 대답할 말도 없어서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오카 사건 회고문’)고 적었다. 일본인들이 앞장서야할 조선인들과 중국인 희생자들의 사체수습 작업에 앞장선 김일수. 그가 없었다면 마쓰다 도키코는 조선인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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