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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나PD의 보통날] 공연 이름 짓기

2018. 10.22. 18:50:38

2년차 초보 기획자 시절, 당시 문화예술 기획자로 진로를 고민하던 한 친구가 업계에 먼저 진입한 내게 ‘기획은 어떤 일이야?’란 질문을 한적이 있다. 나는 그 질문에 잠깐의 고민도 없이 이렇게 대답을 했더랬다. ‘기획일은 책의 목차를 만드는 일과 같아.’ 가끔 이 짧은 대화가 생각난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을 내려버린 초보자의 용감함에 민망한 기분이 먼저 밀려오곤 하는데, 한편으론 어쩜 그렇게 마침 맞은 답을 내렸을까 스스로 신통하기도 한 것이다. 그 시절 그 친구도 결국 문화예술기획자가 되었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은 그가 우리의 그때 그 대화를 가끔 떠올려 주려나? 이제 제법 연차가 쌓였을 그 친구에게도 자기 나름의 정의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쨌든 나에겐 아직 그 정의가 유효하다. 나는 평소 책의 목차를 만들듯 짜임새 있고 체계적으로 일을 추진해 나가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 방법으로 흥미를 돋우는 프롤로그, 따로 메모해 두고 싶은 매력적인 문장문장, 마음속에 짙게 남을 감동적인 결말로 채워진, 잘 쓰여진 책과 같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 정의는 또한 유효하다.

책의 목차를 작성하는 와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과정을 꼽으라면 바로 ‘책의 이름짓기’가 되겠다. 책 전체 내용을 관통하되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할만큼 매력적 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섹시한 타이틀’이어야 하는 것이다. 단정한 목차대로 잘 쓰여진 책, 즉 잘 기획된 한 공연의 흥행성패가 이름짓기에 좌우될 수 있는만큼 공연에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아주 중요하고도 부담스런 일이기도 하다. 이 중요하고 부담 막중한 일을 나는 가장 좋아하기도 한다. 기획자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 중 하나이기도 하거니와 선곡자 또는 예술가의 의도를 읽어내 몇 개 단어로 그 의도를 ‘섹시하게’ 함축해 냈을때의 그 짜릿한 성취감, 예술가의 의도와 나의 경험과 배경지식이 몇 개 단어 안에서 만나게 되는 그 순간을 나는 참 좋아한다.

오케스트라 공연의 제목은 몇가지 유형으로 정리된다. 첫째, ‘안네 소피 무터와 친구들(가칭)’과 같이 연주자나 지휘자의 이름을 타이틀로 삼는 경우. 둘째, ‘광주시향의 신세계교향곡(2018년 1월)’과 같이 작곡가 또는 작품의 이름을 내거는 경우. 또 다른 경우가 ‘러시안 나잇’, ‘즐거운 몽상(2018년 11월)’처럼 공연의 주제를 함축한 경우이다. 공연의 기획의도나 전체 구성, 솔리스트의 인지도, 전체 공연에서 특정곡이 차지하는 중요성 등에 따라 어떤 유형의 제목을 지을지 결정한다. 모든 결정의 기준이자 최종 목표는 공연의 흥행이지만 기획자로서 공연 이름짓기의 즐거움은 역시 마지막 경우에서 가장 크다. 다양한 시대, 다양한 작곡가들의 작품들, 그 작품들의 서로 다른 표제, 서로 다른 음악의 결 사이에서 모두를 아우르고 때로는 더 나아가 새로운 서사를 부여하는 단 하나의 단어를 건져냈을 때 그 쾌감이란!

지난 시즌, 나에게 괴로움과 기쁨을 차례로 줬던 문제적 이름이 있다. 바로 ‘소네트’.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서곡’,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거기에 오페라 아리아 두 곡을 포함한 공연이었다. ‘사랑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한 작곡가들은 한 편의 소네트(사랑을 주제로 한 유럽 정형시)를 쓴 것 아닐까?’, ‘음악으로 쓴 시’ 라는 컨셉으로 공연의 제목을 ‘소네트’로 지었는데 한 음악계 인사로부터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음악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이름짓기는 이렇게나 무거운 일이다) 공연을 진행하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지나친 표현이었나? 이창동 감독은 영화로 시를 쓴다고 했다던데 음악에서야! 아, 괴롭다. 여차여차 공연은 끝이 나고.

한달여 뒤, 김홍재 지휘자님과 단 둘이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지휘자님께서 ‘소네트’ 공연을 잘 소개해줘 고맙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본인이 평소 갖고 다니는 것과 꼭 같은 볼펜을 선물로 건네시며. 예술가의 의도와 나의 경험과 배경지식이 몇 개 단어 안에서 만난 순간! 잘못된 이름짓기를 한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늘 다정한 지휘자님이지만 업무와 관련해서는 처음 해주신 칭찬이었는데, 아무튼 참 신통 방통한 분이시다)

칼럼 연재를 제안받고 칼럼의 이름을 가장 먼저 고민했다. 내용을 정하고 거기에 맞는 이름을 짓는 것이 순서라면 순서겠지만, 처음 주어진 텃밭(지면)이라 심고 가꾸고 싶은 이야기 종이 워낙 많을 것 같아 넉넉하면서도 단정한 테두리(이름)가 뭐 없을까 고민했다. 7년차 이름짓기 선수의 결정은 ‘정PD의 보통날’이다. 기획자의 보통의 날들을 들여다 보면 거기에 음악이야기도, 예술가이야기도, 기획 본연의 이야기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엔 기획자의 의도와 독자들의 흥미가 그 한 단어에서 꼭 만나기를!


글쓴이 정하나는 연세대 원주캠퍼스 영문과 졸업,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원주문화재단·한솔문화재단에서 근무 했으며 현재 광주시립교향악단에서 공연기획담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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