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집안 행사에 나가보면 “우리 탁 씨는 광주 성씨 탁·노·리 중 맨 먼저 나오는 성씨이다”라고 말씀을 들으면서 그게 무슨 말일까 줄 곧 궁금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역사나 고사에 밝은 강원구(한중문화교류회장) 박사를 만나 ‘탁·노·리’에 대해 말씀드리면 “뭐 그런 게 있어요” 정도로 답변을 들었다. 2018년 경렴정 학술대회를 준비하게 됐다. ‘경렴정’은 여말선초의 대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탁광무 선생의 아호이자 정자 이름이기도 하고 선생은 당대의 정몽주, 정도전, 이색, 문익점, 이숭인, 이제현 등과 깊은 교류가 있었다. 그리고 특히 ‘호남’이란 지명을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 호남 정자문화의 효시를 열어간 분이다. 학술대회는 경렴정 선생을 여러 의미에서 조명하면서 성대하게 마칠 수 있었다. 광주를 광주답게 한 인물에 필문( 門) 이선제(李先齊·1390-1453) 선생이 알려져 있고 그에 못지않은 인물로 경렴정(景濂亭) 탁광무(卓光茂·1330-1410) 선생으로 거론하고 있어 이는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 됐다. 거기에다 당시 광산 탁 씨는 ‘권문세족’으로도 명성이 높은 명문거족이었는데 이는 조선의 양반 하고는 다른 개념이며, 고려 때 벼슬이 높고 번창한 집안을 일컫는 말로도 통한다. 이 같은 세력들도 이성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진사대부에 밀려나게 된다. 어쨌든 탁·노·리 성은 시조(始祖)들의 관향(貫鄕)에다가 광주 땅에 오래도록 뿌리를 내린 토성이었다. 간단한 것 같은 이들의 배경에는 광주만의 남다른 자긍심이 밑 받쳐져 있다.

조선 초에 ‘조선팔도의 노래’가 지금의 트롯처럼 유행했던 모양이다. 고려시대에 전국이 5도 양계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지역의 특색을 담아서 민간에 널리 가창되는 민요나 속요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이들 노래가 조선 건국 이후에도 자연스럽게 전승되었으리라 추론된다. 조선 건국은 모든 분야에 큰 변화가 있었고 그중 민요나 속요도 이 무렵의 문화적 특성에 맞게 불렸을 것이다. 우연하게도 ‘조선팔도의 노래 98’에서 광산(光山)의 특성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동쪽에는 창평(昌平)이요 남쪽에는 화순(和順) 남평(南平).

서쪽은 나주(羅州)이고 북쪽은 진원(珍原)이라.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인데 경덕왕 때 무주(武州)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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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노리김(卓盧李金) 채장정박(蔡張鄭朴) 진허반성(陳許藩成) 승유(承庾)가 산다.

무등산(無等山) 양림(陽林) 삼각(三角) 건지(巾之) 어등(魚登) 솟아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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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은 김길(金吉)의 후손이요 정세운(鄭世雲)과 탁광무(卓光茂)라.

여기에서 맨 먼저 등장하는 탁·노·리를 볼 수 있다. 여기에 광산김씨도 함께하지만 이는 네자 씩의 리듬에 맞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광산김씨는 다른 성씨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족이어서 별도로 언급하기로 한 것이다. 그다음의 문헌으로는 1454년(문종 2년)에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이 책은 전국 8도에 속한 328개 군현의 역사, 지리, 풍속, 인물, 토산물 등을 망라하고 다양한 정보가 체계 있게 편집된 지리서다. 이에 따르면 무진군 편에서는 광주 토성 13개 성이 적시된 자리에 『탁노리』가 소개되고 있다. 그 다음 근거 문서로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를 들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는 250권 50책으로 구성됐으며, 1894년 갑오개혁으로 야기된 변화한 조선의 문물제도를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이 문헌에는 우리 역사를 통괄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그 갈래가 16고(考)로 이뤄졌는데 씨족의 항목에서는 단군(檀君) 때에 예국(濊國)의 군장(君長) 여수기(余守己)에게 서씨(徐氏) 성을 내려준 것을 비롯해 마한,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의 각 성씨와 성(姓)의 유래에 대해 총 8권에 걸쳐 서술했다. 바로 여기에 광주 토성이 상세히 기록돼 있고 탁·노·리가 순서로 출현한다.

여기까지 살펴본 광주 토성 13개 성 중 탁·노·리 성은 광주의 대표성을 갖는 토박이 성씨이고 여말선초 때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고려가 조선으로 비록 나라이름이 달라졌어도 지극히 가까운 이웃이었음을 역사적 사실로 짐작하게 된다. 이런 근거 위에 실로 600년 만에 광주를 광주답게 하고 광주의 정체성을 담보한 그 뿌리를 탁·노·리에서 찾기 위해 이를 위한 대표자 모임체를 결성했다. 토박이 3개 성씨 대표성을 갖는 문중인물이 모인 것이다. 600년이 흘렀지만 그때에 광주땅에서 아주 가까운 이웃이기 때문이다. 실로 광주 땅에 박수받을 의미 있는 결사체가 아닐까 한다. 꺼져서 잊혔던 불씨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이 모임을 ‘광주뿌리회’ 로 명명했다. 이게 토박이 광주 사람이 만들어가는 진짜 광주의 ‘문화’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