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는 소낙비가 한바탕 옹골차게 쏟아지더니 소음의 도시 저 편에 일곱 색깔 무지개가 살풋 걸려 있다. 그 순간, 무지개 속으로 상큼했던 내 유년의 여름이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동구 밖, 당산나무, 신작로, 강나루, 장광 뒤의 하얀 접시꽃. 그것들이 어우러져 설핏거리면서 마음은 벌써 고향집 골목 안으로 접어들었다.

사시사철 빛바랜 대문이 활짝 열려 있던 집. 그 문턱에 들어서면 감 익는 냄새가 솔솔 묻어나고 삼밭 그늘에서 긴 혀를 늘어뜨리고 있던 황구란 놈이 살래살래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곤 했다. 책가방을 툇마루에 던져두고 뒤란으로 돌아가 샘물 한 됫박 떠 벌컥벌컥 들이켜고서 한바탕 목물을 하고 나면 얼얼하면서 온몸에 새 피가 쫙 일었다. 수건을 걸치고 마루에 오르면 어머니는 잽싸게 미숫가루 한 대접을 너끈히 괴어 소반에 받혀 왔다. 그 고소하고 찐득한 맛을 무엇에 비할까.

마음이 한결 넉넉하여져 낮잠 한소끔 청하려고 초석 깔린 대청에 드러누우면 매미들의 울음소리는 왜 그리도 성화였던가. 담장 옆 돌배나무, 감나무 안에서 귀가 멍멍 하도록 맴 맴 맴…… 찌르륵, 논스톱으로 합창을 했다. 녀석들은 이 나무 저 나무에서 제법 가락까지 넣어 가며 기차게 울어댔다. 녀석들의 소리에도 사연은 있으리라. 단 일주일의 생을 위해 7년 아니 17년이란 세월을 유충으로 살아야 했던 인고의 날들. 그 끝에 탄생한 생명의 환희를 노래함인가. 아무튼 내 고향 7월은 매미 소리로부터 시작되고 끝이 난다. 하여, 녀석들은 무더운 여름날의 대명사요, 내 마음의 영원한 노스탤지어다.

그곳, 눈을 감으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영상. 하얀 신작로가 열리고 하늘로 치솟던 미루나무 밑을 지나 비틀비틀 자전거를 곧잘 타던 순이의 얼굴이 보이며 문학소녀 진이의 마른 얼굴도 보인다. 그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어둠이 내리면 30촉 전등불이 켜지고 불빛을 따라 극성을 부리던 하루살이, 모기떼들. 쑥대궁을 말려 피운 모깃불 냄새가 여름 내내 온 집안에 알싸했다. 평상 위에 누워 쳐다보는 저녁 하늘은 왜 그리 아름답던지, 별자리를 찾으며 어머니가 들려준 먼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잠이 들곤 했던 날들이 어제이듯 새롭기만 하다.

세월과 함께 결혼을 해서 내가 자식을 낳아 키울 때에도 아이들은 밤마다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취해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내 유년의 여름은 그렇듯 꿈과 사랑과 낭만으로 아롱져있다. 평생을 두고 소낙비 그친 오후의 반짝임과 일곱 색깔 무지개가 오늘처럼 영롱히 떠올라 시도 때도 없이 내 가슴에 아롱다롱 사색의 무늬를 만들곤 한다.

<서순초 약력>
▲‘수필과 비평’ 등단(1992)
▲광주문협인협회 이사, 남도수필 회장 역임
▲수상 : 대한문학상, 황희문화예술상
▲저서 : ‘꽃들의 반란’,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