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사진을 지브리 스타일로 바꿔줘.” 명령어 한 줄이면, 몇 분 만에 깜찍하고 예쁜 내 아이의 개성은 살려주면서도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따뜻하고 몽환적인 감성이 담긴 그림이 완성된다. “내가 쓴 시를 밴드 콜드 플레이 풍의 노래로 바꿔줘”라고 하면 10분 안에 노래 한 곡이 완성된다.

AI 기술은 이제 단순한 오락을 넘어 검색, 광고, 교육, 가전제품, 자동차 등 우리 일상 곳곳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너무나 마법 같아서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거의 묻지 않는다.

옥스퍼드대학교를 중심으로 10년간 30여 개국의 현장을 누빈 세 명의 연구자가 쓴 책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흐름출판·김두완 역)는 보이지 않는 노동과 창의성의 추출 구조를 파헤친다. AI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구조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책의 저자 마크 그레이엄(옥스퍼드대학교 인터넷연구소), 제임스 멀둔(에섹스대학교), 캘럼 캔트(에섹스대학교)는 수백 명의 노동자, 기술자, 투자자, 성우, 검수자 등을 인터뷰하며 AI 산업의 실체를 추적했다.

이들은 오늘날의 AI를 ‘추출 기계(Extraction Machine)’라고 정의한다. AI는 인간의 지식·감정·창의성·노동을 흡수해 데이터를 만들고, 이를 알고리즘으로 가공해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적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미지 생성, 음악 추천, 자율주행, 챗봇 기능 등은 모두 수많은 인간의 반복 노동 위에 작동한다.

메타의 콘텐츠 검수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케냐의 ‘머시’는 하루 수백 건의 혐오 게시물을 검토하며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지만, 그녀의 감정은 시스템 안에 고려되지 않는다.

자율주행차 훈련용 데이터를 수작업으로 분류하는 우간다의 ‘애니타’는 하루 10시간 이상 반복 작업을 수행하고도 1.6달러의 일당을 받는다. AI가 예술성을 흉내 낼 수 있는 것도, 성우나 아티스트의 창작물을 무단 수집해 학습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AI는 인간뿐 아니라 행성의 자원도 추출한다. 아이슬란드의 데이터센터에서 일하는 기술자 ‘에이나르’의 이야기를 통해 AI 기술이 막대한 전력과 물을 소비하며 기후 위기에도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또, AI에 투자하는 실리콘밸리 벤처 자본가들의 결정 하나로 수천 명의 하청 노동자 일자리가 바뀌는 현실도 그려진다. 이처럼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특정한 권력 관계와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장치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책은 ‘디지털 식민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오늘날의 AI 산업이 과거 식민주의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남반구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노동력을 착취해 북반구의 기업들이 이윤을 쌓는 구조. 이것은 알고리즘이 중립적이라는 환상을 깨뜨리는 통찰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단순한 고발서에 머물지 않는다. 케냐의 검수 노동자들이 세계 최초로 디지털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영국 아마존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작업 환경을 바꾸는 사례를 통해 기술을 다시 설계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능성도 제시한다. 알고리즘 설계의 민주적 통제, 플랫폼 노동의 법적 보호, 기술 감시에 대한 시민사회의 권한 강화 등 현실적인 대안도 함께 제시된다.

이 책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AI 도구들이 어떤 사람들의 노동, 어떤 사회적 조건, 어떤 자원의 희생 위에 있는지 보여준다. 기술이 정말로 인간 중심이 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AI의 ‘신비’가 아닌 ‘현실’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선명한 나침반이 될 책이다.

/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