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살아가는 여성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요.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 이게 제 작업의 메시지인데요. 시기별로 재료나 표현방식은 다르지만 제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같아요.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지난 12일 작업실에서 만난 진허 작가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어느 마을이든 장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당산나무가 있잖아요. 세월이 흐를수록 나무의 나이테도 늘어나는데요. 인물 속 켜켜이 쌓인 나이테 형상을 통해 인고의 시간을 겪은 우리네 어머니들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그는 세 아이를 둔 엄마 작가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각각의 여정은 쉽지 않았을 터다. 수많은 삶의 발자취는 시기별 작품 속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꽃같은 인생’

“초창기엔 제 자신에 관한 그림을 그렸어요. 남편을 상징하는 달마시안이 작품 속에 간간이 등장하는데요. 10여년 전 그린 ‘웨딩마치’라는 작품은 결혼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의 그림이에요. 결혼을 하게 되면 화가로서 커리어나 작업이 어려워지게 될 거라는 주위 사람들의 핀잔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는 제 스스로의 믿음을 보여주기도 해요.”

그림 속 깜박이는 신호등이나 새장 안에 갇힌 새 등 불안을 나타내는 요소도 있지만, 결국엔 달마시안과 함께 당당히 길을 나서는 모습은 당시 결혼을 결심한 작가의 의지가 담겨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세 마리의 아기 달마시안이 더해진 작품 ‘결혼사 애정법 시리즈’는 정겨운 가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접한 주위의 모든 것들은 작품 속 소재가 됐다.

(사진 위로부터) ‘내 인생의 가장 젊은날, 오늘’, ‘웨딩마치’,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결혼사 애정법’

“넝쿨같이 생명력 강한 식물을 키우면서 마치 제 모습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닮은 꼴 시리즈’로 나이테 작업을 하기도 했고요. 그 옛날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하던 어머니들에서 착안해 바느질, 뜨개 작업도 했어요. 물감처럼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서 틈틈이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죠.”

약 20여년 간 나이테 선 작업으로 여성 형상을 그려낸 작가이지만, 최근에는 회화 속 인물을 뺀 다소 과감한 스타일 변화에 돌입했다.

“어머니, 여성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 형태를 드러내는 게 너무 직설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던 중 엄마 모습을 나도 모르게 닮아가는 제 자신에 주목하게 됐어요. 저희 어머니가 농사를 짓거든요. 수확한 채소를 한껏 담아주시면서 ‘좋은 거니까 반찬해서 먹어라’ 하시는 게 꼭 아이들한테 제가 하는 말 같았어요. 좋은 것 주고 싶고, 맛있는 거 먹이고 싶고, 항상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게 엄마의 마음이잖아요. 그래서 시작하게 된 ‘야채’ 시리즈 또한 결국 내가 이때까지 하고자 한 이야기와 다를 바 없겠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유화 작업부터 바느질, 천 콜라주 등 다양한 재료적 변화를 거쳐오고 있지만, 지난 20년간 작가가 해온 작업은 모두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제 작업의 원동력은 가족이에요. ‘가정’을 중심으로 한 나이테 작업은 정제된 회화, 바느질 작업 그리고 자유분방한 느낌의 최근작 야채 시리즈까지 이어져 오고 있어요. 아가씨 시절 그리고 결혼한 이후, 출산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제가 거쳐가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작품 속에 오롯이 펼쳐내고 싶어요.”

/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