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소재들의 조합,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보색들의 대비가 하나의 완성도 높은 결과물로 구현됐다. 쨍한 바탕색을 배경으로 새와 인간 그리고 의자가 결합된 기묘한 형상에 오랜 시간 눈길이 머문다. 이철규 작가의 ‘남겨진 자들의 시간’은 우리네 진솔한 삶의 흔적과 흘러간 수많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리즈다.

자신의 삶 그리고 주위 모든 존재들의 이야기를 그림 속에 담아내오고 있는 이 작가를 지난 13일 만났다.

전남대 서양화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오랜 시간 작업을 떠나 살아온 작가는 벽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며 2019년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대학 시절 입체, 오브제 작업을 하며 틈틈이 해오던 작업은 현재 진행중인 평면회화 작업의 밑바탕이 됐다.

‘이방인’

‘남겨진 자들의 시간’

“처음엔 그냥 막연히 손 가는 대로 자동기술법처럼 그려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형태를 구체화해야겠다 생각했죠.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내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했어요.”

주로 선 작업만 해오던 작가에게 방콕 지하철역에서 만난 광고판은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이때껏 그가 배워온 ‘색’은 어느 하나 튀지 않고 바탕과 어우러져 잔잔하게 연결돼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컬러풀한 광고판에 매혹된 그는 그때부터 보색 대비와 명도 차이를 적극 활용하며 작품 속 색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림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소재는 ‘의자’다. 구체적인 사물을 변형하고 재조합해 그만의 방식으로 형상화한 결과물이다.


“의자는 거쳐간 이들의 흔적, 체취를 품고 있잖아요. 이 의자가 내가 된 거예요. 나를 비롯해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간직하고픈 추억 그리고 좌절과 희망 등이요. 이 작은 의자에 삶의 많은 것들이 완전히 투영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작은 위로를 안겨줄 수 있다고 생각했죠.”

지난해 가을, 스페인 전시를 거치면서 느꼈던 감정은 그의 신작 ‘이방인’ 시리즈 모티브가 됐다.

철저하게 동양인이자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을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다. 모호함과 익숙함 사이 이질감, 순간의 찰나에 겪은 외로움 등은 작가만의 스토리가 돼 그림으로 완성됐다.

“남겨진 자들 시리즈가 모두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였다면, 신작 시리즈는 아파하고 인내하며 스스로의 삶을 지탱하는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응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모두는 남들과 다르잖아요. 세상에 태어난 이상 모두에게 이방인인 인간 존재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소녀에게 바침’

‘트레블러’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언어를 선보이고 있는 그는 가방을 활용한 트레블러(여행자) 시리즈, 젊은 날의 어머니에게 헌사하는 ‘소녀에게 바침’ 등을 소개하기도 했다.

“계산적이고 치밀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청년 시절과는 다르게 요즘엔 제 이야기를 비롯해 주위 사람들의 삶에 대해 돌아보고 이를 작품으로 표현해내곤 해요. 마음속 내밀한 것들을 전부 다 보여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렇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상대방도 이해하니까요. 그림 속에 내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낼 수 있는 연습을 이어오고 있어요.”

강렬한 색채, 재구성된 형태의 신선한 조합으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제가 가진 여러 감정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끊임없이 모색해가려고요. 올해 싱가포르 전시에서 제 작품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확인했던 것 같아요. 유럽을 무대로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싶어요. 새로운 기법이나 색채 사용보다 중요한 건 결국 작품 속에 담긴 작가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