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물질과 에너지로 구성돼 있다는 게 현대물리학에서의 정의에요. 예를 들면 어떤 공간에선 강렬한 느낌을 얻잖아요. 눈에 보이고 사진에 찍히는 것도 있지만 분명 담기지 않는 게 있어요. 전 이를 포착해 사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배경을 찍고 여기에 빛을 활용한 기법을 입히는 작업이에요.”

지난 3일 화순 동면 작업실에서 이정록 작가를 만났다. 그는 사진 속에 자연의 빛을 아날로그적으로 담아내오고 있는 사진작가다. 자연에서 포착한 신비로운 생명의 에너지를 ‘빛’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한다.

그가 사용하는 기법은 어둠 속 오랜 시간 셔터를 연 상태에서 사진을 찍는 ‘라이트 페인팅’. 문득 보면 그래픽을 입힌 것 같지만 그의 작품은 오롯이 필름카메라와 플래시만으로 얻어진 결과물이다.

‘Tree of Life 6-2-5’

“사진이라는 매체는 기본적으로 리얼리티를 담보하고 있어요. 우리는 흔히 사진에 찍힌 대상이 어딘가 존재할 거란 믿음을 갖고 있잖아요. 현실적 모습에 어떤 표현이 더해질 때 무엇보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거죠.”

그는 오랜 시간 한곳에 머물고, 며칠에 걸쳐 그곳을 찾고 또 찾는다. 작업은 주로 깜깜한 밤에 이뤄진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시각정보가 사라지고 대상과의 거리감도 희미해진다. 그렇게 피사체와 자신이 그 장소에 공존한다는 느낌이 들면 그때 셔터를 누른다.

‘Decoding Scape 02’

“모든 감각이 열리는 순간이 있거든요. ‘본다’는 행위는 사실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고, 위계관계가 형성돼요. 날이 밝을 땐 피사체의 속살을 보기 힘들거든요. 주로 밤 시간대 여러 방식으로 실험해보고 있어요.”

자연의 생명과 숭고함을 바탕으로 10여 년 간 이어온 ‘생명나무’ 시리즈부터 음각 형태의 배경에 찰나의 빛을 활용해 에너지를 담아낸 ‘나비’ 연작, 흰 사슴이 물을 마시는 연못인 한라산 백록담 전설에서 착안한 ‘루카’ 시리즈 등 무수한 작업들은 자연의 아우라와 그의 상상이 만들어낸 근원적 세계를 표방한다.

지난달 4일 마무리된 서울 포스코미술관에서의 초대개인전 ‘밤, 정화와 승화의 시간’은 작가의 학생 시절 실험적인 작품에서부터 신작까지 아우른 대표작 64점을 선보인 전시였다. 30여 년 작품세계를 총망라한 자리로 이때까지의 작업을 정리하면서도 새로운 개념과 형식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계기가 됐다.

‘LUCA L 8-1’

“옛날 작업부터 최근의 작품들까지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더라고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신비롭다’는 거예요. 많은 존재가 자신의 신비를 쉽게 드러내진 않아요. 주의를 기울이고 정성을 들여야지 이를 감지할 수 있거든요.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기 전 나름대로의 정화 단계를 거칩니다. 작업하기 가장 좋은 상태로 내 자신을 맞추는 거죠. 내면이 투명해지면 그때야 비로소 무언가 보이기 시작해요. 작업은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수개월이 걸리지만 결국 예술의 가치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경이로운 체험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nabi 30’

이성과 언어로는 풀어낼 수 없는 어떤 것. 태생적으로 묘사가 불가능한 체험인 ‘숭고’를 구현하려는 그의 작업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예정이다.

“그간 작업하면서 외부환경뿐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변화가 굉장히 많았어요. 이런 모든 것을 아울러 다시 한번 긴 호흡으로 실험적인 작업을 시작해보고 싶어요. 자연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순전한 기쁨, 이러한 흔적을 형상화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할 생각입니다.”

/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