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자의 작은 행동 / 주홍
2024. 04. 11(목) 19:52 가+가-

주홍 치유예술가

“너를 위해 투표해라. 많은 희생으로 투표권을 얻었단다.”

선거 전날, 멀리 있는 딸에게 꼭 투표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민주주의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있는 세포로 구성된 생물체 같다. 투표소에 줄을 서서 한 표를 행사하는 작은 행동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한다. 개인의 삶도 작은 행동이 중요하고, 나랏일도 한 사람의 작은 행동이 중요하다.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필자는 콩나물에 물을 주듯 자신을 위한 ‘작은 행동’을 매일 하는 것, 크게 웃기, 하늘 한 번 보기, 계단 오르기, 건강한 음식 나누기, 작은 들꽃에 감탄하기, 칭찬하기 등등이 행복의 비결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피로 물들었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에서 민중은 개돼지 취급을 받으며 살아남았고, 남과 북으로 갈라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고 최빈국이 됐던 대한민국. 기본 인권도 주장할 수 없는 노예 같은 노동 환경에서 일하며 자식들은 좋은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던 민중의 부모님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부모 없는 자식처럼 버려진 국민이었던 독재 시절을 견디며 1987년 우리 손에 투표권이 주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을 싸잡아서 운동권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주니 고마웠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투사들 덕분에 좋은 세상이 왔지만, 아직도 옥중에서 싸우며 이번 선거에 소나무당을 만들고 지역구에 출마한 결기의 운동권 출신 송영길. 변치 않는 소나무처럼 검찰독재에 투쟁하는 그의 옥중 유세는 이번 선거에서 가장 마음이 아팠다. 선거가 끝나고 동물의 왕국과 같은 정치의 세계를 다시 확인한다.

필자는 요즘 독재자 박정희가 1972년 10월17일, 유신헌법을 공표하자, 국민을 벌레 취급한다고 떨쳐 일어나 국가권력에 조직적으로 저항했던 전남대학교 운동권 농대학생의 이야기를 샌드애니메이션으로 작업 중이다. 독재에 저항하면 절차도 없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두고 실종되면 시신으로 발견되던 시절이었다.

샌드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윤한봉 선생이다. 합수(合水)라는 별칭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퇴비’처럼 살다 간 분이다. 대학시절, 민청학련 사건 등 세 번의 옥고를 치루고 나왔지만, 꺾이지 않고 조직적으로 투쟁을 이어갔고, 또 수배자가 된다. 전두환 군부쿠데타로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터지자 수배자의 몸으로 도망자가 된다. 잡히면 광주·전남 운동권 동지들이 모두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 염려돼 밀항을 결정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 최초 정치망명자가 된 윤한봉 선생은 10여 개의 재미한국청년연합, 민족학교, 한겨레 운동 미주연합 등 조직을 만들어 조국의 평화운동과 5·18진상규명 활동을 펼친다. 미국에서 광주 오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연대활동은 조국에 있는 동지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망명한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통탄의 시간이었다. 1989년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은 윤한봉 선생의 기획이었다. 우리는 전대협을 대표해서 임수정이 평양을 방문한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인종차별, 소수자 인권 연대의 일을 조직적으로 펼치며 멈추지 않은 운동을 했던 윤한봉 선생은 1993년 혐의를 벗고 귀국의 길이 열린다. 오월 영령들이 잠든 묘역을 찾아 동지의 묘비 앞에서 더 큰 광주 오월의 멍에를 지고 또 조직운동을 한다. 5·18기념재단을 만들고 김남주 기념사업회, 들불열사기념사업회 등을 만들어 동지들의 정신이 이어지도록 했다. 1995년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고 대동정신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에 이어지도록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며 작은 행동을 이어나갔다. 그는 이름도 남김없이 떠났고 이제 역사가 됐다. 우리는 운동권이라고 참 함부로 말한다. 우리가 주권자가 되고 투표용지 한 장의 권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작은 행동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흘린 피가 한 장의 표에 얼룩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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