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을 도정하는 공간인 정미소.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시절, 흰쌀이 도정기에서 쏟아져 나오던 정미소는 풍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식생활 변화로 인해 근현대 농촌의 경관을 구성했던 정미소는 사라지고 그 속에 담긴 우리 삶은 추억이 됐다.

정미소에 얽힌 한국인의 생활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 발간돼 눈길을 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정미소 : 낟알에서 흰쌀까지’ 조사보고서다.

우리나라 도정 방법의 변천, 근대 이후 등장한 정미소의 정착과 발전 그리고 도시화와 산업화 이후 쇠락하게 된 현재 모습까지. 정미소를 중심으로 풀어낸 한국의 도정 문화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 남아있는 정미소와 이에 얽힌 사람들 이야기를 보고서에 담아냈다.

◇인류의 역사 속 곡식 가공

곡식을 도정하는 방법은 시간에 따라 점차 발전해왔다. 갈돌과 갈판, 절구와 같이 단순한 형태에서부터 가축이나 물의 힘을 빌리는 연자매, 물레방아를 거쳐 기계 동력으로 움직이는 도정기까지. 도정 도구는 적은 노동력으로 대량의 곡식을 찧을 수 있는 방향으로 변해왔고, 도정 도구와 도정 방식의 변화는 우리의 문화와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미소는 19세기 말 미곡 반출을 위한 근대 산업으로서 미곡항을 중심으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도정 성능의 우수함, 노동력 및 소요시간 절감 등의 장점에 힘입어 이내 곧 농촌지역까지 급속도로 확산됐으며 빠른 속도로 전통적 도정 도구를 대체했다. 식량증산정책의 시행, 쌀 생산량 증가, 기계의 개량 등과 맞물려 197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는 정미소가 약 2만5천개가 존재했다.

◇소멸돼가는 정미소의 기록

정미소는 우리나라에 도입 이후 10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흥망성쇠를 겪어왔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전통적인 도정 방식에서 정미소로 변화했고, 근대의 산물인 정미소가 우리 삶에 정착하는 과정은 식량증산정책이라는 정책과 궤를 같이 해왔다.

오늘날 정미소는 미곡종합처리장으로 대표되는 신기술의 도입, 식생활의 변화 그리고 도시화 및 산업화 등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렇듯 정미소는 전통적 방식으로 방아를 찧던 때와 자동화 양곡가공공장이 주류가 된 때 사이 존재하던 것으로, 근현대 한국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매개체다.

이번 보고서는 정미소에서의 도정 과정과 방법, 도정 기계와 도구의 사용과 발달, 운영방식 등 정미소가 점차 사라지면서 함께 소멸돼가는 생활문화를 촘촘히 기록했다.

곡식을 쥔 정미소 주인의 손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정미소의 과거, 현재, 미래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형태의 정미소가 존재했다. 쌀 생산량이 지금 같지 않았던 1970년대만 해도 보리를 도정하는 정맥기가 정미기와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고, 밀을 재배하던 지역에서는 제분기를 갖춰 밀가루를 가공했다. 수수, 메밀, 옥수수 등 잡곡을 많이 섭취하는 산간지역 정미소에서는 쌀뿐만 아니라 잡곡 방아도 취급했다. 정미소에서 떡방아 기계를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며, 떡을 만드는 ‘방앗간’과 곡식을 도정하는 ‘정미소’가 엄격히 구분된 것은 오히려 근래의 일이다.

농업 다각화로 쌀 생산량이 감소되고 식생활의 변화로 쌀 소비량까지 줄어들면서 많은 정미소가 수익 저하를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게 됐다. 정미소가 벼만을 도정하는 공간으로 변모한 것도 정미소가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한 후다.

이번 조사보고서에는 일반적인 농촌 정미소에 더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지금은 보기 어려운 형태의 정미소에 대한 현장조사 내용을 수록했다.

아울러 정미소가 사라진 후 그 역할을 대체한 미곡종합처리장의 운영과 가정용 도정기의 사용 사례를 조사해 현재의 모습을 살폈다. 도시의 즉석도정 쌀가게, 폐정미소 활용 사례를 통해 정미소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을지 미래상을 그림으로써 정미소를 둘러싼 한국인의 생활상을 풍부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국립민속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보고서가 그 시절 기억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정미소를 접한 적 없는 세대에는 과거를 경험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보고서는 국립민속박물관 누리집을 통해 내려받기가 가능하다.

/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