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남은 애국지사의 흔적은 대부분 흐릿했지만, 홍범도 장군의 것만은 선명했다.

그 이유는 고려인 공동체 스스로가 장군을 기억하고 후대에 알리기 위해 노력해서였는데, 국내에서 때아닌 이념 논쟁으로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에 ‘멀쩡히 잘 있던’ 홍범도 장군 흉상을 이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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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말년 함께한 고려극장…희곡 남겨져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명령으로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 야니쿠르간 사나리크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크질오르다에 정착했다.

정착 초기 크질오르다 사회는 홍범도 장군을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홍범도 장군은 70대 고령의 나이었고, 카자흐스탄은 항일 독립운동 중심지였던 연해주로부터 6천㎞ 넘게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뒤늦게 홍범도 장군의 실체를 알게 된 현지인들과 고려인들은 장군을 극진히 예우했다.

홍범도 장군이 고려극장 수위(경비)로 말년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일환이다. 강제이주로 인해 블라디보스크에 있던 고려극장 역시 문을 닫게 되자, 크질오르다로 이주한 고려인들은 이곳에 다시 극장을 세웠고 홍범도 장군을 수위로 모셨다.

또 태장춘 고려극장 극장가는 ‘희곡 홍범도’를 쓰고 무대에 올리며 장군의 발자취를 후대로 전승했다.

이렇듯 홍범도의 흔적으로 가득했던 고려극장은 현재 수도 알마티로 이주했고, 그 자리엔 ‘크질오르다 시립 문화의 집’이 들어서 원형을 찾아보긴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고려극장 단원들은 홍범도 장군을 잊지 않고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며 ‘희곡 홍범도’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 8월16일 서울 국회의원관 대회의실에서 열렸던 공연 ‘40일간의 기적-홍범도 장군의 기억 속으로’도 고려극장이 카자흐스탄 국립 아카데미로 설립된 지 90년을 맞아 진행한 특별전이었다.

아이러니하게 그로부터 일주일 뒤 국내에선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말년을 보낸 홍범도 장군은 고려극장의 수위로 근무하다 1943년 10월25일 향년 75세로 서거했다. 알마티로 이주한 고려극장 자리엔 ‘크질오르다 시립문화의 집(사진 上)’이 들어섰고, 홍범도 장군의 생가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식당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인근은 ‘홍범도 거리’로 불린다.

◇‘터 뿐인 묘역’마저 지키는 고려인 후예들

1943년 10월25일 홍범도 장군이 크질오르다에서 향년 75세로 서거하자 소련 당국은 장군의 생가 인근 약 3-4㎞를 ‘홍범도 거리’로 명명했다.

실제 거리에 가보니 홍범도 장군의 초상화가 새겨진 표지판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장군의 생가로 추정되는 곳은 식당 등의 용도로 사용되며 보존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남겼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도 처음엔 이곳 거리 어딘가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3년 크질오르다 중앙공동묘역으로 옮겨졌다.

그러다 1951년 고려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홍범도 장군 분묘수리위원회’는 흉상과 기념비를 세웠고, 지금의 홍범도 장군 묘역을 조성했다.

태극 문양과 함께 한글로 ‘통일문’이라 새겨진 출입문을 지나니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흉상 양 옆에는 홍범도 장군의 연보가 새겨진 비석과 2021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에서 기증한 또 다른 비석이 자리했다.

지난 2021년 8월15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면서, 현재 묘역은 ‘터’ 뿐이다.

그러나 현지 고려인협회는 홍범도 장군을 기리기 위해 묘역을 조성한 고려인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터 뿐인 묘역’마저 정성껏 관리하고 있었다.

이같은 고려인의 헌신을 본 한국인 관광객 배형근(61)씨와 전애선(60)씨는 “자국민으로써 부끄럽다”고 말했다.

일각에서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가입 전력을 두고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반면, 고려인 후손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 홍범도’를 오롯이 기억하며 섬기고 있어서다.

이에 그치지 않고 현지 고려인협회는 홍범도 장군이 크질오르다에 남겼던 유품들을 한 데 모아 전시하기 위한 공간을 마련 중이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지난 2021년 8월15일 대한민국으로 봉환되면서 현재 묘역은 ‘터’ 뿐이지만, 현지 고려인협회는 묘역을 정성껏 관리하고 있다. 사진은 홍범도 장군 묘역에서 만난 박데니스(오른쪽) 크질오르다 고려인협회 부회장과 한국인 관광객 모습.

박데니스(38) 크질오르다 고려인협회 부회장은 “‘홍범도 박물관’을 묘역 내에 조성하기 위해 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모금 운동과 함께 장군이 남긴 흔적들을 모으고 있다”며 “개관 시점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내년 중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박씨는 “우리 세대는 부모님으로부터, 부모님은 또 부모님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애국지사’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며 “장군의 영웅적 행보와 업적이 잊혀지지 않도록 고려인 후예들은 후대 전승에 힘쓸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재영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