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고 경사스러운 희경루(喜慶樓) 중건 / 천득염


- 재생 준비중
2023. 09. 18(월) 19:48 가+가-
조선시대 지방의 행정 단위는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의 순서로 그 위계를 정했다. 각 고을마다 위상에 어울리는 관아와 부속시설을 건립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또한 중앙 왕권이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객사와 향교를 비롯해 동헌, 내아 등의 공공시설이 자리하였는데 더불어 누각도 건립했다. 이를 관아누각이라고 한다. 이제 현대 광주에도 희경루(喜慶樓)라는 장엄한 누각이 새롭게 자리하게 된다.
‘기쁘고 경사스러운 일’이란 의미를 가진 희경루는 조선시대 광주목 읍성 내에 있었던 관아의 누각이다. 희경루의 연혁과 건축형태 등에 관해서는 기문(記文), 시문과 그림, 지리지 등에 나타나고 당시 고지도의 표기를 통해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신숙주의 기문(1451년)에 의하면 1450년 태수 안철석이 고을 안에 관유(觀遊) 할만한 장소가 없는 것을 아쉽게 여겨 1년여 뒤 새로이 누(樓)를 짓고자 고을의 어른들과 의논하였더니 예전에 무너진 공북루(拱北樓)의 터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해 동향으로 누각을 지었다 한다. 그 터는 지금의 충장로 우체국 자리로 비정된다.
사실 희경루가 건립되기 20여년 전인 1430년(세종 12년)에 읍민 노흥준이 당시 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사건으로 인해 광주목에서 강등돼 무진군이 되었던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이런 까닭에 누각이 지어진 6월에 필문 이선제 등이 강등 당한 지 20년이 됐으므로 옛 이름을 찾아 다시 광주목으로 복구해 달라고 상소를 올려 문종 임금의 복호(復號) 허락을 받는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으니, 이 누각의 이름을 희경루라 하게 됐다. 아울러 이 누각의 동쪽엔 대로가 지나며 그 길 건너에는 활 쏘는 장소를 두어 관덕(觀德)을 하게 했고 서쪽엔 대나무 숲, 북쪽엔 연꽃이 가득 심어진 큰 연못을 두는 등 누각과 주변의 풍광이 잘 갖추어졌음을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관아 누각으로는 광한루와 영남루, 촉석루, 죽서루 등이 있는데, 이들의 건축형태와 외부경관은 유사한 부분이 많다.
여러 가지 고문헌 자료에 의하면 희경루 건립 경위와 연대를 비롯해 소실과 중수가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장 실증적인 자료로서는 1567년(명종 22) 당시 광주목사 최응룡, 전라도관찰사 강섬 등 5명이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지 2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희경루에서 가졌던 계회(契會)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가 전하고 있다. 이는 16세기에 그려진 과거시험 동기생들의 모임을 그린 계회도(契會圖)로 광주목 관아에 부속된 희경루의 모습과 방회 장면, 주변 경관 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그림이다. 그림은 위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정면부감투시(正面俯瞰透視)와 대각선에서 바라보는 평행사선투시가 이중투시로 적용돼 두 가지 시점이 각기 독립적으로 한 화면에 표현돼 있다. 그림에 의하면 희경루는 높게 쌓은 기단 위에 누 아래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구성한 팔작지붕의 누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둥열 보다 약간 더 돌출된 위치에 계자난간을 돌렸고, 기둥에 붉은 색칠을 한 석간주와 기둥 상부의 공포 부분에 전통 초록색인 뇌록(磊綠)이 채색된 점으로 보아 심언광의 ‘희경루기’에 묘사된 단청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지방 관아에서 가장 치성을 드려 건립한 누각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희경루는 마치 수도의 궁궐에 자리한 경회루에 버금갈 정도로 규모가 크고 중층의 구조로 넓은 마루와 계자난간을 사용하여 개방감과 확장감을 주고 있다.
전라도라는 이름이 나타난지 1000년이 지난 2018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희경루 복원사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복원할 수 없어 중건이나 재현이 적절하다는 제안이 있었다. 또한 현실적으로 원래 위치로 추정되는 충장로에 중건하기가 어려워 새로운 위치를 고민하다 광주공원 모서리가 좋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물론 이곳은 향교의 부속건물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었다.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 끝에 전통적인 도시공간의 건축이 보기 드문 광주에 새롭게 당당한 모습으로 희경루가 중건됐으니 당호의 뜻처럼 누대에 걸쳐 기쁘고 경사스런 일들이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차제에 광주읍성의 대표적인 성문인 진남문도 중건됐으면 하는 꿈을 꾸어본다. 바라건대 멀리 보는 누각으로만 두지 말고 시민들의 일상에서 쉽게 접근하고 다양한 공적 행사에서 자주 사용되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각종 글쓰기대회, 사령장 수여, 다회 등 광주 시민의 문화적 품격이 발현되는 모임이 이뤄지면 의미가 더욱 클 것이다.
‘기쁘고 경사스러운 일’이란 의미를 가진 희경루는 조선시대 광주목 읍성 내에 있었던 관아의 누각이다. 희경루의 연혁과 건축형태 등에 관해서는 기문(記文), 시문과 그림, 지리지 등에 나타나고 당시 고지도의 표기를 통해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신숙주의 기문(1451년)에 의하면 1450년 태수 안철석이 고을 안에 관유(觀遊) 할만한 장소가 없는 것을 아쉽게 여겨 1년여 뒤 새로이 누(樓)를 짓고자 고을의 어른들과 의논하였더니 예전에 무너진 공북루(拱北樓)의 터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해 동향으로 누각을 지었다 한다. 그 터는 지금의 충장로 우체국 자리로 비정된다.
사실 희경루가 건립되기 20여년 전인 1430년(세종 12년)에 읍민 노흥준이 당시 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사건으로 인해 광주목에서 강등돼 무진군이 되었던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이런 까닭에 누각이 지어진 6월에 필문 이선제 등이 강등 당한 지 20년이 됐으므로 옛 이름을 찾아 다시 광주목으로 복구해 달라고 상소를 올려 문종 임금의 복호(復號) 허락을 받는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으니, 이 누각의 이름을 희경루라 하게 됐다. 아울러 이 누각의 동쪽엔 대로가 지나며 그 길 건너에는 활 쏘는 장소를 두어 관덕(觀德)을 하게 했고 서쪽엔 대나무 숲, 북쪽엔 연꽃이 가득 심어진 큰 연못을 두는 등 누각과 주변의 풍광이 잘 갖추어졌음을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관아 누각으로는 광한루와 영남루, 촉석루, 죽서루 등이 있는데, 이들의 건축형태와 외부경관은 유사한 부분이 많다.
여러 가지 고문헌 자료에 의하면 희경루 건립 경위와 연대를 비롯해 소실과 중수가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장 실증적인 자료로서는 1567년(명종 22) 당시 광주목사 최응룡, 전라도관찰사 강섬 등 5명이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지 2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희경루에서 가졌던 계회(契會)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가 전하고 있다. 이는 16세기에 그려진 과거시험 동기생들의 모임을 그린 계회도(契會圖)로 광주목 관아에 부속된 희경루의 모습과 방회 장면, 주변 경관 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그림이다. 그림은 위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정면부감투시(正面俯瞰透視)와 대각선에서 바라보는 평행사선투시가 이중투시로 적용돼 두 가지 시점이 각기 독립적으로 한 화면에 표현돼 있다. 그림에 의하면 희경루는 높게 쌓은 기단 위에 누 아래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구성한 팔작지붕의 누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둥열 보다 약간 더 돌출된 위치에 계자난간을 돌렸고, 기둥에 붉은 색칠을 한 석간주와 기둥 상부의 공포 부분에 전통 초록색인 뇌록(磊綠)이 채색된 점으로 보아 심언광의 ‘희경루기’에 묘사된 단청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지방 관아에서 가장 치성을 드려 건립한 누각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희경루는 마치 수도의 궁궐에 자리한 경회루에 버금갈 정도로 규모가 크고 중층의 구조로 넓은 마루와 계자난간을 사용하여 개방감과 확장감을 주고 있다.
전라도라는 이름이 나타난지 1000년이 지난 2018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희경루 복원사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복원할 수 없어 중건이나 재현이 적절하다는 제안이 있었다. 또한 현실적으로 원래 위치로 추정되는 충장로에 중건하기가 어려워 새로운 위치를 고민하다 광주공원 모서리가 좋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물론 이곳은 향교의 부속건물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었다.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 끝에 전통적인 도시공간의 건축이 보기 드문 광주에 새롭게 당당한 모습으로 희경루가 중건됐으니 당호의 뜻처럼 누대에 걸쳐 기쁘고 경사스런 일들이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차제에 광주읍성의 대표적인 성문인 진남문도 중건됐으면 하는 꿈을 꾸어본다. 바라건대 멀리 보는 누각으로만 두지 말고 시민들의 일상에서 쉽게 접근하고 다양한 공적 행사에서 자주 사용되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각종 글쓰기대회, 사령장 수여, 다회 등 광주 시민의 문화적 품격이 발현되는 모임이 이뤄지면 의미가 더욱 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