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 물결을 따라 길을 떠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신록이 눈부시다. 봄에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활력 넘친다.

남파랑길 64코스가 시작되는 고흥군 남양면 망동마을에 도착했다. 남파랑길 64코스부터는 고흥 땅을 걷게 된다. 망동마을회관 뒤쪽으로 망동마을 가옥들이 망주산을 등지고 자리한다. 망주산은 여자만 쪽으로 돌출되어 솟아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여자만의 푸른 바다와 징검다리 같은 섬들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망주리는 망동, 평촌, 와야, 잠두마을 등 네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뤄져있다. 남파랑길은 망동마을에서 평촌, 와야마을로 이어진다. 마을 앞 네모반듯한 논에는 호밀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지난 가을 추수를 끝내고 심은 호밀은 대표적인 녹비작물로서 잡초발생을 억제하고 유기물인 질소를 공급해준다. 논 가운데로 난 농로를 따라 걷다가 마을길을 지나기도 하고, 얕은 언덕길을 따라 오르기도 한다.

언덕길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니 와야마을 뒤로 고흥군과 보성군의 경계를 이룬 봉두산(426m), 두방산(486m)·병풍산(479.5m)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와야마을 뒤로 고흥군과 보성군의 경계를 이룬 봉두산, 두방산·병풍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이 산봉우리들은 고흥반도가 시작되는 초입에 솟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고흥반도를 포근하게 감싸준다.

부드러운 야산과 야산자락에 올망졸망 자리한 농경지를 바라보며 걷다보니 내가 농부가 된 것 같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농사일하러가는 부모님을 따라 논이나 밭에 나가곤 했다. 농촌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내 가슴속에는 농촌의 정서가 자리하고 있기에 농경지를 곁에 두고 걸을 때는 고향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길가에서는 민들레나 유채꽃, 봄까치꽃 같은 꽃들이 봄을 즐기고 있다. 잠두마을 앞쪽에는 넓은 간척지 논이 자리하고 있다. 방조제를 막아 생긴 농경지다. 우리나라 남해안과 서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는데, 작은 만을 이룬 곳의 양쪽 끝을 가로질러 막아 몇 백m에 이르는 방조제를 만들어 간척지 논을 일군 곳이 많다.

길은 신망간척지 농로를 따라서 이어진다. 농로를 벗어나 잠시 2차선 도로를 따라가다가 고흥남양중학교를 만난다. 남양중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학생수 현황을 찾아보니 1학년 3명, 2학년 5명, 3학년 4명 등 총 12명에 불과하다. 이 학교의 학생수가 오늘의 농촌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준다.

농업과 농촌이 죽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농촌은 어디랄 것 없이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인구 2천명이 안 되는 면이 계속 늘어난다. 그것도 대부분이 고령층이다. 농촌은 우리국민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곳이다. 2021년 기준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44.4%, 곡물자급률은 20.2%에 불과하다. 코로나19 대유행과 기후변화로 인한 기상이변, 우크라이나전쟁 등으로 국제곡물가격이 급등했다. 이에 따라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이 심화되고, 식량안보에 대한 절박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농업과 농촌을 살리기 위한 획기적인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장동마을 앞을 지난다.

조그마한 방죽을 앞에 두고 가옥들이 옹기종기 둥지를 틀고 있다. 방죽 둑 아래 산자락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농로가 정겹다.

오도방조제에 가까워지자 거군저수지가 기다리고 있다. 저수지 한쪽은 습지를 이뤄 갈대숲이 조성돼 있고, 물속에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저수지 한쪽은 습지를 이뤄 갈대숲이 조성돼 있고, 물속에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낮은 야산 너머로 남쪽 멀리 고흥을 대표하는 산 팔영산이 고개를 내민다.

낮은 야산 너머로 남쪽 멀리 고흥을 대표하는 산 팔영산이 고개를 내민다. 팔영산은 여덟 개의 봉우리가 솟아있어 여자만을 낀 해변 어디에서나 손쉽게 알아볼 수 있다.

남파랑길은 바다가 보이지 않는 오도방조제 안쪽 아래로 나 있지만 방조제 위로 올라가니 여수반도·화양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형성된 여자만이 시원하게 바라보인다. 넓게 펼쳐진 여자만에는 여자도와 장도 같은 섬들이 떠 있다.

여자만 건너 동쪽 멀리 여수반도의 산줄기들이 스카이라인을 이룬다. 여자만으로 돌출해 솟은 망주산과 산자락 해변마을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물이 빠지는 시간이면 가까운 바다는 갯벌로 변한다.

오도방조제와 오도2방조제 사이에는 외호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 마을은 오도라는 작은 섬이었다. 오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방조제를 막으면서 오도는 육지가 됐다.

남파랑길은 외호마을 앞을 지나 오도2방조제로 들어선다. 오도2방조제에 올라서니 미덕도, 백일도, 진지도 같은 섬들이 이웃처럼 가깝다.

바다를 막아 간척지를 만들면 방조제 안쪽에는 바닷물과 민물이 섞인 조류지가 생긴다. 조류지는 바닷물이 간척지 논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아주는 완충역할을 한다.

방조제 안쪽으로 넓은 간척지 논이 펼쳐진다. 간척지 논은 벌써 모내기를 위해 논갈이를 마쳤다.

조류지 뒤로 넓은 간척지 논이 펼쳐진다. 간척지 논은 벌써 모내기를 위해 논갈이를 마쳤다. 넓은 농경지를 앞에 두고 곳곳에 마을이 둥지를 틀었다. 간척이 되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락거렸을 것이다.

슬항마을과 연등마을을 차례로 만난다.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폐가도 많고, 인구가 줄어 마을은 조용하기만 하다.

연등마을을 지나 임도 숲길로 들어선다. 오늘 구간은 대부분 농로를 따라 걷는 길이라 다소 지루한 감이 있었는데, 신록 산뜻한 숲길로 들어서니 신선한 느낌이 든다. 나무들이 가져다주는 산뜻한 향기가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길지 않은 임도를 지나자 독대마을과 앞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울긋불긋 피어있는 봄꽃들이 푸른 바다에 수채화를 그려놓았다. 독대마을 앞에 길쭉하게 떠있는 백일도 뒤로 여수 땅 화양반도에 솟은 산봉우리들이 손짓한다.

독대마을로 내려서니 느티나무 고목 몇 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마을주민들의 쉼터역할을 하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정자에서 바라보니 독대마을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독대마을은 2018년 기준 151호에 652명의 주민이 거주한다. 자연부락으로서는 굉장히 큰 마을이다.

독대마을 앞 150m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곳에 백일도라는 섬이 있다. 백일도는 원래 내백일도, 외백일도, 소백일도, 옥금도 등 네 개의 작은 섬이었는데 간척사업을 통해 하나의 섬이 됐다. 백일도는 독대마을과의 사이에 다리가 놓여있어 육지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백일도와 독대마을 주변 산줄기에 둘러싸인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화롭다.

이런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 마음도 평온해진다.

백일도와 독대마을 주변 산줄기에 둘러싸인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화롭다. 이런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 마음도 평온해진다.

<장갑수·여행작가>

※여행쪽지
▶남파랑길 64코스는 고흥 땅을 지나는 첫 구간으로, 주로 농로를 따라 걷다가 소박한 농촌마을을 만나곤 한다. 방조제에 올라서면 여자만과 작은 섬들이 만든 바다풍경을 즐길 수 있다. 도착지점인 독대마을 앞바다는 섬으로 둘러싸여 잔잔하고 포근하다.
※코스 : 팔영농협 망주지소→평촌마을→남양중학교→오도방조제→슬항마을→독대마을
※거리, 소요시간 : 14.3㎞, 4시간 소요
※출발지 내비게이션 주소 : 팔영농협 망주지소(고흥군 남양면 망월로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