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고향 길 / 수필 - 최수례
2021. 08. 02(월) 19:45 가+가-
내 마음엔 언제나 퇴색할 줄 모르는 사진 한 장이 걸려있다. 코스모스 흐드러진 너머로 누런 벼이삭이 풍요로운 고향길이다. 경운기가 덜컹거리며 지날 때마다 흙먼지가 뿌옇게 날리던 신작로 풍경만 떠올리면 어머니 품에 안긴 양 편안해진다. 내 나이 어언 지천명에 이르렀으나 그 길에는 아직도 젊은 어머니가 계시고 장난기 많은 개구쟁이 친구들이 뛰어논다. 어머니는 꽃무늬 고운 포플린 원피스에 예쁜 파라솔을, 꼬마 녀석들은 검게 그을린 얼굴에 넓적한 토란잎을 양산 삼아 쓰고 지나간다. 해가 어느 정도 이울면 소 판 두둑한 전대를 차고 얼큰히 취한 아버지가 비틀비틀 흥이 올라 걷는 모습도 보인다.

그 길에는 아직 세상 이치를 모르던 내 순수가 서려 있다. 등에 업고 벼포기에 달라붙어 있는 메뚜기가 엄마와 아기인 줄 알고 안쓰러워 꼭 살려 보내곤 했었다. 어쩌다 아이들이 ‘한꺼번에 두 마리를 잡았다’고 신이 나서 소리 지르면 짠한 생각에 눈가가 붉어지곤 했다. 아마도 그때 붙잡힌 메뚜기가 짝짓기중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가슴이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뒤가 마려운 아이가 코스모스 사이로 들어가 볼일을 보고 꽃과 잎을 쥐어뜯어 밑을 닦는 걸 마을 이장께 이른 것도 그 길에서다. 새마을 사업의 하나로 꽃길 조성이 한창이었기에 이장님의 꾸지람은 참으로 대단했다. 어른 같았으면 그까짓 일로 일러바친 나를 내내 원망도 했으련만 우린 자고새면 또 스스럼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이처럼 자잘한 추억이 서려 있는 그 길이 지금은 도시물이 오른 처녀처럼 아스팔트로 곱게 단장했으나 왠지 수더분한 고향 아씨를 잃은 듯 아쉬움만 인다. 고향 정서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비슷한 길이라도 한번 걸어 볼 양으로 인근 마을을 서성여보지만 가는 곳마다 거의 매끈하게 포장이 되어 흙길 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종종 눈에 띄는 코스모스마저도 제철을 망각한 채 미처 자라지도 않고 꽃을 피우고 있다. 벼이삭도 왠지 아스팔트 길에는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그 나라가 문명국인지 아닌지는 잘 닦여진 도로를 보고 안다지만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이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될 때마다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린 듯 마음이 허전해진다. 예전 생활의 불편을 익히 알기에 그저 내 정서도 문명 따라 흐르려니 하면서도 추억이 서린 옛 정취를 지워버릴 수가 없다.

어려서는 아주 넓어 보였지만 지금 가보면 차 두 대가 비켜 가기에도 빠듯한 길, 군데군데 서 있던 아름드리나무들마저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땅가시 나무 밑에 벌집이 무성하던 ‘하누고개’는 훤하게 뚫려서 마음을 더욱 허전하게 하고, 길가에 있던 시원한 옹달샘도 오염이 되어 예전의 그 물맛이 아니다. 옛 형체를 잃은 길이지만 그러나 나는 끄떡없다. 마음속에 저장해 놓은 한 장의 사진이 있지 않은가?

티 없이 맑던 유년 시절이 거기 있기에 하찮은 좁은 길 하나가 이렇게 그리움을 일게 하나 보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일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을 꼽으라면 철없이 뛰놀던 유년기를 택하고 싶다. 그다지 풍족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조부모님과 부모님 사랑 속에 대체로 다복한 생활이어서 내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것들이 참 많았다. 어려서 철도 없었으려니와 어른들 사랑도 각별해서 마음껏 고집도 부리고 투정도 하면서 정말 천진난만하게 자란 것이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라 누구와 그렇게 심하게 다투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가벼운 싸움질이라도 한 날이면 할아버지의 역성이 그리워서 십 리가 짱짱한 그 신작로를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며 돌아오곤 했다. 울다 지치면 잠시 길가에 앉아 쉬었다 다시 울고, 다시 울고 하다 보면 어느새 집에 다다르곤 했다. 이제는 내 곁에서 역성을 들어 줄 어른들도 다 저세상으로 떠나시고 형제들도 각기 제 살기에 바쁜 지금 그리움이 서린 고향 신작로에서나마 위안을 받고 싶어 종종 추억을 들추어본다.

길은 우리에게 어디로 오고 가는지를 제시해주는 중요한 통로이다. 더구나 고향 길은 걸음마를 배우고 처음 흙을 밟아본 곳이 아닌가. 교통수단의 의미를 떠나 두고두고 마음의 쉼터 역할까지 해내는 것 같다.

<최수례 약력>
▲1995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국제펜클럽, 한국문인협회, 광주문인협회 회원
▲광주수필문학회 부회장, 광주여류수필문학회 회장역임
▲연암문학상 대상, 매월당문학상 대상, 송강문학상 본상 수상
▲무원문학상 대상, 허균문학상, 영호남수필문학 대상 수상
▲수필집 ‘홀딱 벗고 정신 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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