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양식은 특성상 대학에서 올 곧게 전공하고 졸업 후, 많은 시간을 연마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또한 90년대 이후 우리 미술시장에서 수묵은 점차 밀려나 외면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학에서 수묵을 전공하는 학생도 크게 줄어들고 작품 활동을 하는 수묵화가도 형식 변화를 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박문종은 수묵화가로 전업의 일관성은 일상의 어려움을 접어둔 삶이었다. 그의 우직스런 고집과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날로 빛을 잃어가는 수묵의 가치를 지키는 화가는 귀하다. 특히 민중미술계에 수묵화가는 진정 귀하다. 그 귀한 작가이기에 그의 소중함은 더욱 크게 보여 진다.


▶전통수묵은 5월의 무거움을 품다
고교졸업 후에도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박문종은 70년대 중·후반을 광주 연진회에서 본격적인 전통수묵을 수업했다. 당시 연진회는 높은 이상향의 정신세계와 예술을 지향하며 필을 능숙하게 세우고 맑은 발묵을 위한 연마의 과정이었다. 그것이 (의재)허백련 선생이 지향하는 예술이기에 가르치는 사람, 배우고자는 사람 모든 이들의 공통된 목표였을 것이다. 박문종도 예외 없이 그러한 이상향의 전통 수묵에 충실했다.

80년 5월, 박문종은 군 전역과 함께 시골(목포)에서 조모님의 재사준비 중 ‘광주사태’의 뉴스를 접하게 된다.

80년대 초, 광주 농성동 작업실을 진보적 지인과 함께 상당기간 함께 보내고 시대정신에 대한 의식을 서서히 깨우치면서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받게 된다. 시대와 역사 앞에 예술의 역할,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한 예술의 정당성 등 진보적 작가정신으로 무장돼 간다. 동시에 중국 혁명 시 리얼리즘(Realism) 미술과 ‘노신’의 목판화 개몽운동, 인물화가 포함된 화집과 복사본을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된다. 혈기 왕성하고 정의감이 강한 그에게 충격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리얼리즘 미술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의 첫 전시를 비롯한 80년대 수많은 서울의 진보그룹전에서 초대전은 그에게 자신감과 함께 예술가로의 소명의식을 심어줬던 계기가 됐다.

수묵화가 박문종은 연진회와 국전을 비롯한 공모전 입상, 늦깍기로 대학에서 전통의 연마를 파기하고 이단자의 길을 자체하게 됐다. 수년간 연마를 거듭해왔던 전통 수묵의 필법은 긴 그림자로 남겨두고 형상성이 강한 수묵을 따뜻한 아침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들듯이 축척시켜 갔다.

이에 박문종은 이렇게 자신의 예술세계 변화에 대해 “5월 광주가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라며 소박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러나 그는 강직한 성품, 농민 삶에서 체득된 땅에 대한 애착을 고려해보면 예술가로 역사와 시대 앞에 소명의식을 갖는 예술적 태도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본다.

‘비닐하우스’ (광주비엔날레 본전시 설치 작품 2002)

▶장지위의 거친 황토바람
1988년 12월 인사동 ‘그림마당 민’전시는 큰 성과와 함께 격려가 됐다. 당시의 작품은 대다수가 여인이 누워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먹그림이었다. 작품은 모두 갈필을 사용해 거칠고 진한 초묵으로 어둡기만 하다. 암울하고 고통스럽고 희망이 보이지 않은 깊은 터널의 시대상황을 담는 그림들이었다.

‘두엄자리’ (135×70㎝ 종이에 먹, 채색 1988)

가장 집중되는 작품은 ‘두엄자리’(1988)다. 거친 들판에 임신을 한 시골여인이 누워있는 그림으로 손과 발은 인물의 비례를 무시한 왕발과 왕손이다. 그리고 한 손에는 연꽃을 쥐고 있다. 썩어 두엄이 돼가는 어둡고 무거운 시대를 비관하고 있지만 그 임신한 여인은 몸속에 잉태한 희망의 환생을 굳건한 손에 쥐고 있는 연꽃으로 묵시적 암시를 하고 있다. 그리고 강건하게 그려진 여인의 왕발과 왕손은 땅을 근본으로 농사를 우선했던 민중의 숙명임을 상징한다. 드러난 젓 가슴은 그 희망을 위한 또 하나의 암시이자 5월 광주의 잔인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어 보인다. 이시기 그의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와 시대를 읽어가는 거친 호흡과 우리미술에 있어 자생적 조형성에 대한 진진한 태도, 대담한 화면 구성과 강한 필력으로 집중된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미술은 ‘포스트 모던’의 흐름 속에 전통적 예술양식의 경계는 붕괴되고 많은 예술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박문종은 예술 양식에 대한 진보성을 드러내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던 그는 시골집에 쌓아둔 황토 흙을 담은 비료포대자루에 관심을 갖고 황토색과 상징성에 주목을 하게 된다. 황토를 머금은 장지의 발색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색채였다. 황토 빛 장지위에 먹그림은 두터움의 완성도를 높여 주는 시각적 효과를 줬다. 이렇게 황토를 이용한 수묵작업은 1995년 금호미술관 초대전에 준비한다.

금호미술관 초대전 작품은 여전히 투박하고 거친 붓놀림이지만 경쾌함과 서정성, 농부의 삶에 대한 진지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농사꾼 태생이었던 그는 땅이 삶이자 그 연장선에 존재하는 예술의 근본이 됐다. 전시작품은 전형적인 농촌풍경을 독창적인 조형어법으로 두텁고 투박한 형태, 세련되지 못하고 고졸한 형상미, 전형적인 남도미학으로 대별되는 조선시대 막사발 분청자의 같은 정스러운 넉넉함이 있다. 주목받은 작품 ‘우는 여자 2’(1995)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젊은 여성을 모습을 대형화면에 대담하게 그려넣었다. 80, 90년대 시골의 젊은 여성은 도시로 돈을 찾아 눈물로 떠나야 했던 그 모습으로 거친 형상의 여인은 두텁고 강한 먹선은 왠지 가볍고 자유롭다.

‘과수원’ (220×143㎝ 종이에 먹, 흙, 채색 1994)

그만큼 박문종은 예술의 대범함과 독창적 예술관은 넓이와 깊이가 남다르다. 그는 이러한 인물의 조형성을 어디서 출발시켜 놓은 것일까? 아마도 그의 대범한 예술적 스케일과 세계관, 고졸한 형상미학이 함께 어울려진 결과일 것이다.

그는 황토의 거친 바람을 묵필의 장·단 호흡으로 투박하고 고졸한 농법의 농사를 짓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친을 도와 농사를 지었던 기억을 장지에 옮겨 놓은 것이다.


▶광주비엔날레와 대인시장의 농사
박문종은 2000년대에 들어와 어느 때보다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광주비엔날레는 2002년 본 전시와 2008년 대인시장 프로젝트에 초대받는다. 이외에도 광주와 서울에서 4차례의 개인전과 다수의 초대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 것은 대인시장의 5년일 것이다.

그에게 제4회 광주비엔날레 참여는 새로운 도전을 해볼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우선 그에게 마련된 광주비엔날레에서 장르적 양식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시도를 하게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이 아닌 옥외중정에 넓은 공간이 마련되었다. 바닥과 벽면에 비닐을 깔고 그 비닐에는‘ㅛ ㅛ’라는 지도에서 논을 상징하는 기호와 함께 그려진 농부가 주술하는 듯한 비정형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사방체 볏단 묵음을 배치해 놓았다. 어찌보면 유희적이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거친 설치작품이었다.

그는 평소 모내기의 퍼포먼스를 밝혀왔었던 터라 광주비엔날레가 그러한 장을 마련해 줬으니 신바람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설치했으나 그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을 것이다. 농사개념 도입과 상징성, 볏짚을 배치한 공간해석이 아쉽고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람객에게는 소소한 볏단과 비닐에 그려진 논의 기호와 장난스러운 농부의 이미지로 현대미술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는 공간설치에 대한 해석과 오브제에 대한 상호이해와 상징성을 경험했을 것으로 평면이 아닌 공간은 농법을 달리한 농사의 교훈을 얻었으리라 생각된다.

박문종에게 의미가 깊은 것은 ‘대인시장 프로젝트’다. 그는 10년을 홀로 외롭고 적막한 시골의 소박한 작업실에서 광주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해왔었다. 시골의 삶은 지치도록 외로움의 고달픔이 깊어갈 즈음이었다. 그에게 ‘대인시장은 시골에서 10년의 외로웠던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매일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미술인,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막걸리로 시간을 즐겼다. ‘성일역취’(醒日亦醉)의 나날이었다.

대인시장은 상권이 죽어가던 도심의 재래시장으로 예술인이 거주하면서 시장은 난장이 되고 특히 주말 야시가 되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됐다. 재래시장이 문화예술로 포장되면서 광주의 명소로 주목받게 됐다.

그는 대인시장 프로그램의 중심에서 기획자로 때로는 참여작가로 분주히 활동하면서 인상 깊은 ‘넋 건지다’라는 작품의 퍼포먼스를 했다.

그의 퍼포먼스 ‘넋 건지다’는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난장으로 관람객은 숙연한 분위기에서 작품을 지켜봐야 했다. 일부 학생은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박문종은 대인시장에서 점묘풍의 작품을 시작한다. ‘땅-대지’(2015)는 왜 장지에 수많은 황토색의 점으로 여인이 형상을 점으로 찔러 그려놓고 다시 장지를 비정형적으로 구겼다가 펴는 작업을 하는 것일까? 땅과 농부, 사람과 사람의 수많은 인연을 담아내는 의미, 화면에 점을 찍어가는 주술적 의미일까? 마치 원시미술에서 보여주는 고졸하고 거친 비정형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듯이 그는 장지에 점을 찍어가면서 땅과 농부의 관계 설정과 땅을 근본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우리의 원초적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우는 여자’ (142×203㎝ 종이에 먹, 흙 1995)

▶전통의 이단자, 농사미학 창조
박문종은 농부였기에 자신의 예술은 농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의 진보적 예술 태도는 전통가치에 대한 갑갑함과 새로운 예술양식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도전을 해왔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작품 활동에서 일관성을 드러내고 있는 땅에 대한 소중함과 함께 농촌의 피폐한 현실을 반어적으로 경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사회는 후기산업화의 가속으로 도시 투기꾼들은 호시탐탐 농촌의 땅을 탐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 그의 작품은 땅의 소중함과 농촌현실의 무거운 메시지는 유희적인 예술행위에 감추고 있을 뿐이다.

그의 미학어법을 거시적으로 본다면 투박한 고졸미와 비정형의 이미지 덩어리이다. 그러한 이미지의 형상은 세부적인 설명이나 객관성에 관해서는 의미를 두지 않는다. 투박한 선의 고졸성과 미완성의 형상,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는 아쉬움…. 그것이 지금까지 독창적으로 창조된 자기 미학어법의 성과이다. 그는 농사 짓는 농부였기에 가능한 조형성 일게다. 비록 그의 작품에 형상은 거칠고 세련미나 완성도는 아쉬워 보이지만 오히려 자연스러움이 내재해 있다. 즈음해 고백을 한다면 그동안 필자가 그의 작품을 경직된 미학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았는가? 자문해 본다.

박문종은 전통수묵의 이단자로 양식적 경계를 파기했다. 자유분방한 예술적 태도로 창조해가는 농사예술, 현대인에게 농촌과 농사의 현실과 땅에 대한 소중성과 애착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농부 박문종은 오늘도 담양 수북의 소박하고 작품들로 난장이 돼버린 작업실에서 호미와 쇠스랑이라는 필을 세우고 씨앗을 뿌리는 새로운 그림농법을 실험하고 있을 것이다.

박문종(1957년 무안생)
▶연진회 1기 수료
▶호남대학교 미술과졸업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원 졸업
▶개인전 10회(목포, 광주, 서울)
▶단체초대전
2016, 동학전 (전북도립미술관)
2014, 이응노 대나무치는 사람(이응노기념관)
2009, 이스탄불교류전(광주시립미술관)
2008, 광주비엔날레 프로잭트(대인시장)
2002, 광주비엔날레 본전시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