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기획
지역
사람들
오피니언
TV
기획
인터뷰
해양실크로드
문학마당
스타브랜드
창조클럽
역경강좌
장갑수

[그림 밖 화가들] 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수잔 발라동
거칠고 강렬한 인생…자신과 그림에 대한 진실한 사랑

2019. 09.10. 18:14:30

수잔 발라동 作 ‘가족초상’(1910,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 여성들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 그렇지 않아? 내 생각에 신은 나를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여성 화가로 만들어주신 것 같아.”

자화상이 아닌 타인에 의해 그려진 모습이 이렇게나 많은 이가 또 있을까. 게다가 자신이 그린 모습과는 극명하게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것까지도, 이보다 더한 누군가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르누아르, 드가, 로트렉 등 인상파의 거의 모든 화가들의 뮤즈였던 여인, 하지만 더 이상 남성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고 싶지 않았기에 스스로 붓을 들었던 여인. 신이 자신을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여성 화가로 만들어주신 것 같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삶을 개척해간 여인. 그녀의 상상은 현실이 됐다.

1894년, 프랑스 국립예술학회에 전시된 그림들로 그림이 전시됐다. 무수한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됐지만, 남성이 아닌 여성화가로는 최초였다. 또 최초의 여성 아카데미 회원이란 타이틀도 따라붙었다. 뒤엉킨 실타래같았던 시간도 있었지만,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까지도 당당하게 국가의 인정을 받는 화가가 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삶의 밑바닥보다도 더 바닥에서부터 시작된 인생이었다. 늘 가난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생계를 위해선 무엇이든 해야 했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사생아로 태어났고, 가족의 따스함이라곤 저 멀리 다른 세상의 이야기들이었다.
수잔 발라동 作 ‘푸른 방’(1923, 퐁피두 미술관)
당시 파리 재개발로 도심은 번화하고 깔끔하게 정비돼 가고 있었다. 부유한 부르주아들은 화려한 도심으로 모여들었고, 가난한 예술가들과 노동자들은 점점 밖으로 밀려나 몽마르트에 정착했다. 사생아였던 수잔 발라동도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 거리의 야생마처럼 지냈기에 학교에도 적응하지 못했고, 집에서 조용히 지내기보다는 밖에서 자유분방하게 활보하기를 좋아했다. 춤추며 놀기를 좋아했던 소녀였지만, 가난만큼은 12살 소녀에게도 녹록지 않은 버거운 것이었다. 생계의 현장에 뛰어들어 세탁부, 웨이트리스, 재봉사 등도 해봤지만, 가장 좋았던 건 서커스단이었다. 자유분방한 성격을 분출하기에는 제격이었다. 14살, 서커스단에 입단하고 공중곡예사로 무대 위를 누볐지만 신은 그다지 너그럽지 않았다. 가혹하게도 말에서 낙상하는 사고로 인해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었다. 절망적 마음에 몽마르트 언덕의 술집을 전전하며 혹독한 인생의 헛헛함을 달랬다. 하지만 몽마르트는 그녀의 또 다른 인생을 열어주었다. 그녀의 충만한 끼를 단번에 알아본 이는 화가 로트렉이었다. 귀족출신이었지만 불구의 몸으로 몽마르트의 환락가를 오가던 그는 발라동을 예술 안으로 인도했다. 개성 넘치는 얼굴, 관능미 넘치는 육체는 숫한 남성 화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로트렉의 소개로 드가, 르누아르 등 당시 인상파 화가들의 모델이자 뮤즈로 인생 2막이 시작됐다.

갓 스물도 되지 않은 젊은 여성은 남성 화가들의 그림 속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복숭앗빛 뺨이 발그레하고, 청초하기 그지없는 어여쁜 숙녀는 다소곳하게 앉아 정숙한 여인으로 부끄러운 몸을 살짝 들춰내고 있었다. 무려 26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인관계가 되었던 르누아르의 그림 속 그녀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뭇 남성과 함께 춤을 추는 청초한 모습이거나 이제 갓 소녀티를 벗고 여인으로 뽀얀 속살을 드러낸 수줍은 모습이었다. 청순하고도 매혹적인 눈빛과 관능미 넘치는 모습으로 그려졌건만, 발라동에게는 이는 결코 자신의 진짜 모습일 수가 없었다. 생계를 위해 선택한 일이었지만, 진짜 자신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그림들을 보며 발라동은 스스로의 진짜 모습을 더욱 갈구했다.
수잔 발라동 作 ‘자화상’(1898, 휴스턴미술관)

결국 타인에 의한 인생이 아닌 자신 스스로의 인생을 선택했다. 화가로 나아가겠노라고 결심한 순간 그녀의 삶은 저 아래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됐다. 르누아르의 화실에서 쫓겨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낳았다. 사생아였던 그녀가 또 사생아를 낳은 것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아들과 함께 거친 세상 속에서 진정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자신을 화가가 될 수 있게 이끌어준 로트렉이 새로 지어준 이름, ‘수잔 발라동 Suzanne Valadon’으로 다시 세상 앞에 나섰다. 더 이상 타인의 시선으로 담겨지던 ‘메리 클레멘틴 발라동 Marie Clementine Valadon’은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감싸 안으며 바라봤다. 인생의 밑바닥을 살아온 고단했던 자신의 몸,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지만, 강인하게 버텨온 한 인간의 몸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화려한 색채로 치장되지도, 수줍은 미소도 없는 그저 현재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갔다. 생존을 위한 한 인간의 분투는 투박한 붓질로 거칠고 강렬한 그림이 됐다. 뭇 남성 화가들에게는 욕망의 대상이었던 매혹적인 여인의 모습이었지만, 그녀 자신에게 스스로의 모습은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고단한 인간의 모습 뿐이었다. 결코 나약하지 않고 강인하게 삶을 버텨가는 힘은 그대로 그림에 배어났다. 출산 직후의 여인으로, 살찌고 억센 몸의 여인으로 자신을 그리며 가난한 예술가로 고군분투하며 생존을 향한 투지와 열정으로 명작의 탄생을 예고했다.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천재작곡가 에릭 사티와의 사랑, 변호사 폴 무시스와의 결혼, 이혼 후 너무도 파격적이었던 아들 친구와의 사랑으로 세간의 끝없는 염문이 무성했지만, 발라동에게 진실한 사랑은 자신 스스로와 그림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파란만장한 사생활들을 뒤로 하고 ‘최초의 여성 아카데미 회원’, ‘최최의 국립예술학회 전시’등 최초란 단어는 그녀의 수식어가 되었다. 삶의 맨 밑바닥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치유하며 독립적 인간으로, 삶의 주체적 인간으로 당당히 살아가고자 했던 강인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그림을 보면 기운이 샘솟는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시작한 모델에서 자신의 삶을 살고자 선택한 예술의 길, 제 아무리 험난한 길도, 궁핍함도, 강인한 의지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었다.

“예술은 우리가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한다.” - 수잔 발라동

광주매일 TV

실시간 HOT 뉴스

가장 많이본 뉴스

기사 목록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