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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당] 백양사에서 박영덕 수필

2019. 09.09. 18:20:44

봄꽃은 모두 졌고 가을꽃들은 나들이를 시작하기 전이다. 어디를 가나 푸른 빛깔이 산과 들을 덮고 있다. 여름 내내 피는 나무 백일홍도 있고 의젓한 덩굴꽃 능소화도 있지만 여름은 들뜨게 하는 꽃의 계절이 아니고 생명의 깊이가 느껴지는 나무와 풀의 계절이다. 조금이라도 도시를 벗어난다면 사방의 푸르름을 통째로 심호흡하는 행복감을 맛볼 것 같아서 차를 몰아 교외로 달렸다. 늘 그렇듯이 목적지를 작정해 두고 나선 길이 아니면 나의 드라이브 귀착지는 대개가 백양사 입구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다음 파라솔을 펴들고 경내로 향한다. 절로 드는 계곡엔 물이 많이 불어나 있다. 금년 여름엔 집중호우가 잦은 탓이다.

“산은 좋은 곳이지만 한번 집착하여 시설하기 시작하면 시정이 되고, 서화는 운치 있는 일이로되 한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장사꾼이 된다……. 대개 마음이 물들지 않으면 욕계(欲界)가 곧 선도(仙道)요, 마음이 붙잡히면 낙경(樂境)도 고해가 된다.”

경내가 가까워지자 채근담의 한 구절이 스피커를 타고 내려온다.

어느 새 목 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 손수건을 꺼내어 닦으려니 파라솔이 벗겨진다. 황급히 고쳐 들으려니 자신이 우스워진다. 자연이 그리워 밖으로 나왔으면서 자연의 중심인 태양은 가리지 못해 안달이라니. 선승들의 말대로 나는 한낱 ‘소등에 앉아 소를 찾는 어리석은 중생’ 일지 모른다. 아무리 흐르는 시냇물의 모습이 지장의 모습이요, 솔바람 소리가 관음의 소리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탈삼매의 법어(法語)가 아니던가. 파라솔을 받쳐든 채 나는 법당 안도 기웃거려 보고 마당도 거닐어 본다. 그러다가 문득 수필가 J 선생이 생각나 법당 뒤로 걸음을 옮겨 본다. 정갈하다. 단정한 사람의 뒷모습 같다. 그러고 보니 J 선생의 모습을 닮아 있지 않은가. 한때 절집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J 선생은 어느 절이고 절집에 가면 꼭 법당 뒷길을 거닐어 본단다.

한 곳을 돌아서니 ‘이곳은 수행자들이 정진하는 곳이니 들어오지 마시오’ 란 표지가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당, 8고 (八苦)를 쓸어버린 탈의 경지가 있지도 없지도 않은 듯 내리쪼이는 햇별 아래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나무들의 잎새가 바람도 없는데 흔들리고 있다. 잠시 숨을 멈추고 쳐다본다. 하나하나의 잎이 저마다의 몸짓이다. 저러다가도 큰바람이 불어오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몸을 누일 것이다.

떼어 놀래야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것이 절과 물이런가. 돌확 가득 약수가 넘쳐 난다. 약수는 역시 돌확에 넘치는 맛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생명이 용출되는 기(氣)가 느껴진다. 모처럼 샘다운 샘가에 앉아 목을 축이니 영혼까지 정화된 듯 정신이 맑아 온다. 이래서 절은 고풍의 옷을 입었으면서도 청량감을 주는 것인가. 몸을 일으켜 대웅전 뜰에 서니 한 마리의 낮새가 서녘 하늘로 날아간다.

대웅전 댓돌 위, 가만히 한 발을 올려놓아 본다. 세상 만물이 모두 부처고 부처의 법이라더니 돌도 고요히 마음을 비추어 보면 그 안에 만법이 있단 말인가. 발 끝에 전해지는 느낌이 여느 댓돌과는 다르다. 잘 닳아 반들반들해진 목기를 어루만질 때의 느낌과 같다. 이 댓돌에 의지하고 법당을 오른 사람들은 무엇을 소원하고 무엇을 이루었을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채웠을까.

한쪽 문이 열리며 비구니 한 분이 나온다. 희고 고운 얼굴이다. 달빛에 여과된 배꽃 같다고나 할까. 깊고 맑은 눈매엔 불해운무(佛海雲舞)가 서려있고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는 모습엔 고해중생의 연민이 어려있다. 질서를 잃은 지 오래인 내 마음의 얼개를 꿰뚫어 보셨음인가. 한번 합장하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간다.

“부디 성불하소서.”

혼자서 스님과 이별을 하고 절을 나왔다. 머잖아 이 푸르름도 또 한번의 생을 마감하고 본래로 돌아갈 것이다. 생사를 하나의 고리로 보는 불가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오면 가야 하는 평범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뉘 있으랴. 다만 정점(頂点)에서 버리고 떠나는 아름다운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돌아오는 길, 철 이른 코스모스가 군데군데 피어 있다. 철 모르고 피어 난 것이 어디 저 뿐이던가. 종심(從心)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철없이 피어나고 싶어 하는 내 마음도 있는 것을.


<약력> 1992년 ‘월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이사, 광주문인협회 부회장, 수필문우, 대표에세이, 남도수필 회원, 현대그룹문학상, 박용철문학상, 광주예총문화대상, 광주문학상, 대한문학상, 저서 ‘달개비꽃에는 상아가 있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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